항목 ID | GC067002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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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三陟府下部行政區域 |
영어공식명칭 | Subdivision of Administrative Regions of Samcheokbu|Choson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조선 |
집필자 | 배재홍 |
[정의]
조선시대 삼척도호부 산하 행정 구역.
[개설]
처음 삼척도호부 산하에는 부내·노곡·장생·미로·북평 등 5개 리가 있었다. 그러나 1630년경 매곡·덕번·소달·박곡 등 4개 리를 신설하여 총 9개 리가 되었다. 그 후 숙종 연간에 리를 면으로 개칭하는 한편 장생을 상장과 하장, 덕번을 근덕과 원덕, 북평을 도상과 도하로 각각 분리·신설하여 총 12개 면이 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면리제는 조선시대 국가가 지방 지배를 위하여 군·현을 면(面)과 리(里)로 세분하여 편제하던 지방행정제도이다. 고려후기 이래의 자연 촌락 성장과 중앙집권화의 진전에 의하여 국가 권력이 군·현의 하부 단위인 촌락에까지도 개입하게 되면서 형성된 촌락 운영 체제이다. 이 면리제는 조선초기에 실시되기 시작하여 조선후기에 정착되었다.
『경국대전』에는 5호(戶)를 1통(統), 5통을 1리(里)로 각각 하고 몇 개의 리를 합쳐서 1면(面)을 만들고 통에는 통주(統主), 리에는 이정(里正), 면에는 권농관(勸農官)을 각각 둔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전기에 실제 향촌 단위로 운영되던 리는 법전 규정과 달랐다. 자연 촌락이 그대로 리가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 여러 개의 촌락을 묶어서 리로 운영하는 형태였다. 이는 조선전기의 자연촌이 아직 독자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몇 개의 리를 묶어 면으로 편성한다고 하였지만 실제 조선전기의 면은 읍치(邑治)와 동서남북 4개 면으로 나누는 방위면(方位面) 편제였다. 여기다가 군·현 밑에는 직촌화(直村化) 되지 않은 임내(任內)[고려·조선초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던 지방 행정 구역]도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로 오면서 자연촌의 성장에 따라 면리제는 새롭게 편제되었다. 우선 몇 개의 촌을 묶은 큰 규모의 리가 분리되어 개별 자연 촌락이 독자의 리로 기능할 수 있게 되었다. 숙종 대에 제정된 ‘오가통사목(五家統事目)’에는 이전과 달리 리의 독자성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다. 이와 함께 면의 편제도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전의 방위면이 좀 더 많은 면으로 세분화되거나 해체되었으며, 리가 면으로 승격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면과 리에는 운영을 담당하는 면임(面任)과 이임(里任)이 있었다.
[관련 기록]
허목(許穆)[1595~1682]의 『척주지』를 비롯한 삼척 지역 읍지에는 삼척도호부 산하 면과 리 관련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
조선전기 삼척도호부의 하부 행정 구역인 면과 리가 어떻게 편제되어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아마도 부내(府內)·노곡(蘆谷)·장생(長生)·미로(眉老)·북평(北坪) 등 5개 리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630년(인조 8) 경에 당시 부사 이준(李埈)[1560~1635]이 매곡(邁谷)·덕번(德蕃)·소달(踈達)·박곡(璞谷)·견박곡(見朴谷) 등 4개 리를 신설하여 총 9개 리가 되었다.
그 후 숙종 연간[1674~1720]에 리를 면으로 개칭하는 한편 장생을 상장(上長)과 하장(下長), 덕번을 근덕(近德)과 원덕(遠德), 북평을 도상(道上)과 도하(道下)로 각각 분리·신설하여 총 12개 면이 되었다. 그런데 허목이 1662년(현종 3)에 편찬한 『척주지』에는 덕번을 덕번상(德蕃上)과 덕번하(德蕃下)로 분리하여 각각 리지(里誌)를 작성하였다. 이를 보면 1662년 당시에 이미 덕번리는 상리와 하리로 나누어 실제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허목은 덕번하는 원덕번(遠德蕃)이라고도 하는데 궁촌(宮村) 남쪽 지역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원덕은 1830년대 후반에 부사 이규헌(李奎憲)이 신덕(新德)으로 개칭하기도 하였다. 또 1829년(순조 29)에 순찰사 이기연(李紀淵)[1783~?]의 지시에 의하여 각 면의 면임으로 집강(執綱)[면장, 이장을 일컬음]을 두었다.
한편 『여지도서』에 보이는 1759년(영조 35) 당시 삼척도호부의 면과 리 개수는 12개 면에 총 102개 리이다. 각 면에 소속된 리의 개수는 차이가 많다. 가장 많은 리를 거느린 면은 부내면으로 소속 리가 15개이다. 다음은 원덕면으로 14개이다. 가장 적은 리를 거느린 면은 도하면으로 소속 리는 5개이다.
각 면의 호수와 인구수를 보면 부내면이 626호에 2711명으로 호수와 인구수가 가장 많았다. 그다음은 원덕면으로, 509호에 2600명이다. 가장 적은 면은 상장생면이었다. 153호에 675명이다. 한편 각 리의 호수와 인구수를 보면 호수의 경우 가장 많은 호수를 거느린 리는 근덕면 교가리로 299호였다. 가장 적은 리는 부내면 가을천리로 8호이다. 인구수의 경우 가장 많은 리는 근덕면 교가리로 1398명이었다. 가장 적은 리는 견박곡[박곡]면 고전리였다. 40명이다.
[변천]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 개혁 때 삼척도호부에서 삼척군으로 개명되었지만 산하 행정 구역은 별다른 개편이 없었다. 다만 면의 집강과 리의 존위(尊位)[한 동네의 어른이 되는 사람]에 대한 종래의 임명제가 폐지되었다. 집강은 면내의 존위와 공선인(公選人)이 선출하고, 존위는 리 주민 총회에서 선출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 삼척도호부 산하 면과 리는 근대 이후에도 별다른 개편 없이 유지되어 독자 기능을 발휘하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