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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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農民組合-勞動組合 |
영어공식명칭 | Farmers Association and Labor Un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청희 |
[정의]
일제 강점기 강원도 삼척 지역에 있었던 농민·노동 단체.
[개설]
1931년 초 신간회 삼척지회와 삼척청년동맹의 해체론이 제기되면서 삼척 지역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지도할 새로운 기관으로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을 조직하기로 합의하고 활동하고 있던 핵심 인물들이 치안유지법 위반과 주거침입 강도죄 등으로 검거, 처형됨으로써 삼척 지역의 혁명 농민조합과 노동조합 결성 움직임은 일단 실패로 끝났다.
[설립 목적]
일제강점기 때 삼척 지역의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을 지도하기 위한 노동조합 및 농민조합을 조직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20년대 들어와 민족운동과 민중운동 모습은 일제 통치에 대한 저항과 지주나 자본가에 대한 경제 투쟁이라는 양면성을 띠고 있었다. 이에 따라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 조직화되고 활성화되어 갔다.
1920년대 삼척 지역의 혁명 민족운동과 민중운동은 삼척청년동맹, 신간회 삼척지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농민조합이나 노동조합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1931년 초 신간회 삼척지회와 삼척청년동맹의 해체론이 제기되면서 삼척 지역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지도할 기관으로 삼척청년동맹이 있었다. 삼척청년동맹의 정건화(鄭健和)·심부윤(沈富潤)·황운대(黃雲大)·이상인(李尙寅)·박래빈(朴來賓)·전엽(全燁)·서두인(徐斗仁)·오원모(吳元模) 등 삼척 지역 활동가들은 1931년 5월경 삼척군 내에 노동조합 또는 농민조합을 조직하기로 합의하고 정건화는 남양농민조합 조직, 황운대는 정라노동조합의 조직을 각각 책임지기로 하였다. 이것이 삼척 지역의 농민조합, 노동조합 조직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조합 조직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경찰에 발각되는 삼척적색농민조합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다 다시 삼척 지역의 혁명 농민조합과 노동조합 결성이 본격화한 것은 원산 출신의 활동가 김덕환(金德煥)이 가세하면서부터이다.
조직의 확대 강화를 위해 김덕환, 심부윤, 황운대 3인은 1931년 10월 말 근덕면 동막리심부윤의 집에 모여 비밀 결사인 K회를 조직하고 비서부 책임 황운대, 조직 연락부 책임 김덕환, 교수부·구원부 책임 심부윤으로 부서를 결정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덕환은 정라항(汀羅港), 황운대는 덕산리(德山里)에 각각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하여 지구 책임을 정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삼척 지역의 혁명 농민조합과 노동조합 운동은 비밀 결사인 K회의 등장과 함께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직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핵심 요원인 심부윤과 황운대가 근덕면 사무소 습격 사건의 주모자로 검거되고, 중심 활동가인 김덕환이 주문진으로 피신하면서 K회는 와해되었다.
K회가 와해된 후에는 삼척 노농공작위원회에 의하여 그 운동이 계승되었다.
근덕면 사무소 습격 사건으로 구속된 심부윤은 1933년 3월 출옥하여 7월 24일 변소봉(卞小鳳), 정석대(鄭錫大), 박래빈(朴來賓), 이상인(李尙寅) 등과 함께 삼척 지역의 적색노동조합과 농민조합 결성을 위한 준비 기관으로 삼척노농공작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삼척노농공작위원회는 중앙부 책임 심부윤, 근덕면 책임 이상인, 북삼면 책임 박래빈, 삼척면 책임 정석대, 정라항을 중심으로 한 온유(鰮油) 노동조합 조직 책임 변소봉 등으로 부서를 정하였다.
이때 전 삼척의 노동자·농민 적화와 이들의 정치·경제 해방 및 공산 제도 건설을 내용으로 하는 운동 강령도 제정하였다.
처음 이들은 심부윤의 제안에 따라 소비조합을 조직하여 동지를 모은 뒤 소비조합을 혁명 농민조합으로 전환시키려고 하였다가 당초의 계획을 바꾸었다. 그 대신 비합법 운동으로 방향을 정하여 공작 위원회를 조직한 뒤 지역 단위로 혁명 농민조합과 노동조합 결성에 주력하였다.
1933년 9월 중순 삼척군 북삼면 각 리에 적색 농민 조직을 전제로 북삼면 적색농민조합조직위원회 책임에 박래빈를 두고 그 아래 쇄운리 농민조합 책임에 최윤달, 이도리와 송정리에도 각기 최춘희(崔春熙)와 홍순혁(洪淳赫)을 책임자로 두고 농민조합 결성을 준비하였다.
근덕면에서는 책임 이상인이 중심이 되어 노동부와 농민부를 각각 두었다. 그러나 실제 노동부 쪽만 조직이 결성되었고 농민부는 농민조합이 결성되지 못하였다.
삼척면에서는 책임 정석대를 중심으로 운수부와 온유 비료부를 두는 등 노동조합 결성에 힘을 쏟았다.
이후 삼척 지역 사회 운동은 1933년 12월 하순경 근덕면 사무소 습격 사건으로 도피해 있던 김덕환이 돌아와서 ‘산업별 노동조합 조직 지도위원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면서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사회운동의 방향이 공장 지역으로 집중되면서 삼척 지역의 농민조합 운동은 장기간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쇄운리농민조합의 핵심 인물인 정의찬과 최윤달이 1936년 11월 21일 북삼면 적색농민조합 재건위원회를 조직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검거되었다. 삼척 지역 농민조합과 노동조합조직 및 사상운동을 전개하다 먼저 검거된 황운대·변소봉·이개동(李開東)·정건화·심부윤 등은 1936년 12월 23일 경성복심법원 형사 제2부에서 치안유지법 위반과 주거침입 강도죄로 변소봉 징역 4년, 황운대 징역 3년, 이개동, 심부윤 각 징역 2년 6월, 정건화 징역 1년 6월을 각각 선고받았다. 또 북삼면 적색농민조합재건위원회를 조직한 혐위로 검거된 정의찬과 최윤달이 1937년 4월 30일 함흥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됨으로서 삼척 지역의 혁명 농민조합과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던 움직임은 일단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K회와 그 뒤를 이은 노농공작위원회를 통한 삼척 지역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지도하기 위한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의 조직은 실패하였지만 그 정신은 그대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