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024 |
---|---|
한자 | 衣生活 |
영어공식명칭 | Costum Life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기대 |
[정의]
세종 지역의 주민들이 생활하면서 착용하는 의복이나 의복 관련 풍속.
[개설]
의생활은 의복의 착용이나 이와 관련된 풍속을 의미한다. 세종 지역 주민들도 일상적인 생활문화의 하나로 의복을 착용하여 왔다. 전통 측면에서 성별이나 신분 및 의례, 직업과 일의 종류 등에 따라 다양한 의복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의복과 관련된 풍습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되어 왔으며, 현대화된 생활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의복 및 관련된 풍습의 특징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의복과 일상생활]
의생활은 일상의 생활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연령대와 성별 기준으로 나누어진다. 어린이, 젊은이, 어른, 노인의 남성복과 여성복으로 흔히 구별할 수 있다. 세종 지역 아동들이 전통적으로 입던 의복은 전국적으로 아동들이 입던 의복과 특별히 차이가 나지 않는다. 남아의 경우 바지저고리가 기본이다. 여아는 남아보다 더 갖추어 입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동의 경우도 유아에서 4살 정도까지의 시기와 4살부터 초등학교 나이대까지가 다르다. 유아의 경우는 남아나 여아 구별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젊은이의 일상복은 총각의 경우 바지와 저고리를 기본으로 하였다. 다만 조치원에 철도가 놓이면서 서양식 의복이 일상복에 영향을 미쳤다. 조치원 신흥1리사무소의 ‘외딴말박물관’에는 1936년에 찍은 쌍류간이학교[조치원 최초의 소학교] 1회 기념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당시 사진에 등장하는 남성들의 경우 검은색과 흰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으며, 일부 교원의 경우 양복을 입고 있다. 처녀의 경우는 치마와 저고리가 일반적이며, 학생들은 검정 통치마와 흰 저고리가 일종의 정장으로 여겨졌다.
남자는 단발령이 있은 이후에 대머리나 하이칼라였기 때문에 서양식 모자가 새롭게 필요해졌다는 것이 시대 변화를 보여 준다. 바지와 저고리를 기본으로 하면서 양복을 입기 시작하였다. 농업 중심으로 일을 하던 남자들은 여름에 주로 삼베나 무명으로 된 옷을 입었다. 일의 형태가 농업 중심에서 도시의 여러 가지 일들로 분화되면서 일상복과 일복의 구별이 점점 사라져 갔다. 여자는 치마와 저고리가 기본이었다. 결혼을 하였으면 쪽머리를 하고 백통 비녀를 꽂았으며, 집안 형편에 따라 은비녀를 하기도 하였다. 세종 지역의 유교적 학맥은 지역적으로 회덕의 은진송씨 집안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있듯이 노론이 주도하였다. 경상도 지역 의복 연구에서 노론 집안 여성들은 자락 치마의 여밈을 왼쪽 여밈으로 하는 풍습이 있고, 소론 집안 여성 의복보다 더 멋을 내었다고 한다. 충청도 지역에서도 비슷한 풍속이 있었다는 것을 통하여 세종 지역 양반가 여성들도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인 의복은 젊은이 의복과 비교하여 종류도 많고 옷감도 좋았다. 또한 새로운 의복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전통 의복을 유지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래서 지역의 풍속 사진에서 노인들이 전통 의복을 착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역적으로 농촌사회가 기반이었기 때문에 남성의 경우 상투는 틀지 않는다 하더라도 탕건을 쓰기도 하였으며, 특히 제사를 지내거나 향교에서 행사가 있는 경우 전통 복식을 더욱 갖추어 입고 있다. 여성의 경우 몸빼가 일제강점기 이후 널리 퍼지면서 자주 착용하는 복식이 되었다. 특히 조치원에는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였기 때문에 여성들이 몸빼 옷을 받아들이기가 더욱 수월하였다.
세종특별자치시의 의복 원료로는 『부강면지』에 따르면 비단, 무명, 베, 광목, 옥양목이 쓰였다고 한다. 광목과 옥양목은 공장의 직조물이라 외지에서 구입하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편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연기군이 전국적으로도 목화를 재배하기 좋은 곳이라고 되어 있다. 세종 지역에서도 목화를 원료로 무명을 짜서 옷을 해 입는 것이 좀 더 일반적이었으리라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