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2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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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翰林亭- |
영어공식명칭 | Hallimjeongnaru |
이칭/별칭 | 한림나루,한림진,배터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
시대 |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강창숙 |
제정 시기/일시 | 조선시대 - 한림정 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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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4년 - 한림정 중건 |
비정 지역 | 한림정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곡리 |
성격 | 나루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한솔동과 금남면 영곡리를 이어 주던 금강의 나루.
[명칭 유래]
지명은 금남면 영곡리에 있는 정자 한림정(翰林亭)에서 유래하였다. 한림이란 명칭은 조선 중종 때 한림학사 신준미(申遵美)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이곳에 은거 중 정자를 지으려고 터를 닦을 때 마침 그 앞을 지나던 젊은이가 말에서 떨어져 죽자 정자 짓는 것을 중단하였고 후세에 신씨 문중이 그 터에 정자를 지어 ‘한림정’이라 불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한림정나루는 조선시대에 서해안의 강경 등지에서 소금, 새우젓, 굴비 등을 실은 배가 올라왔던 곳이며 동시에 옛 남면 송원리(松院里) 머레[머래]에서 하류의 공주로 밀이나 보리방아를 찧기 위해 다녔던 곳이다. 금남면은 공주의 명탄면(鳴湠面), 양야리면(陽也里面)이었다가 1914년 연기군에 편입되면서 금남면이라 불리었다.
조선시대 송원리 주민들은 본래 한림정나루를 이용하여 금강을 건넌 후에 북쪽의 대교장이나 남쪽의 감성장을 출입하였다. 감성장과 대교장은 1920년대 총독부에서 조선 장시[정기 시장]의 변화상을 조사할 당시에도 포함될 정도로 규모가 컸던 장이었다. 조선시대 한림정나루는 육상의 역로와 금강의 뱃길이 교차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한림정은 금강 8경의 하나이다. 현재의 한림정은 1964년 평산신씨 한양공파 종친회의 발의로 중건(重建)한 것이다.
[관련 기록]
192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의 시장경제』에서는 “한다리장[大橋場]이 1910년부터 1912년 사이 공주에서 조치원을 경유하여 충주까지 이어지는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점차 쇠퇴하였다.”고 기록하였다.
[현황]
한림정나루 북단(北端)은 소위 행정중심복합도시 ‘첫마을 2단계’ 건설지역에 편입되었고, 한림정나루 송원리 쪽은 나루터는 물론 마을 흔적조차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주막이 있던 구간이 ‘아침뜰 근린공원’으로 조성되었고, 공원 내에 동구나무와 송원리 마을 표지석이 남아 있다. 한편 한림정이 자리 잡고 있던 옛 연기군 금남면 영곡리[현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곡리]는 건설지역에 편입되지 않아 옛 경관의 일부가 남아 있다. 현재 한림정나루 남쪽 금남면 영곡리 구릉에 한림정이 있으며, 연기면 세종리[옛 남면 송원리]과 금남면 영곡리를 잇는 당진-영덕고속국도 구간에 금강교가 건설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