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501 |
---|---|
한자 | 全義邑誌 |
영어공식명칭 | Jeonuieupji |
이칭/별칭 | 전성지 |
분야 |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기도 과천시 교육원로 86[중앙동 2-6]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경순 |
[정의]
1901년 편찬된 충청도 전의군의 읍지.
[형태/서지]
필사본 1책으로, 이칭은 ‘전성지’이다. 표지에 한자로 ‘全城誌’가 쓰여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전의읍지』의 내용은 건치연혁(建置沿革)·군명(郡名)·관직(官職)·성씨(姓氏)·강역(疆域)·방리(坊里)·도로(道路)·형승(形勝)·산천(山川)·성지(城池)·풍속(風俗)·토산(土産)·진공(進貢)·공해(公廨)[관가 건물], 그리고 학교(學校)·서원(書院)·단묘(壇廟)·누정(樓亭)·호구(戶口)·전결(田結)·부세(賦稅)·요역(徭役)·창곡(倉穀)·봉름(俸廩)[조선시대에 벼슬아치에게 주던 봉급]·군액(軍額)·군기(軍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교량(橋梁)·장시(場市)·사찰(寺刹)·이임(莅任)[새로 부임하여 사무를 봄]·인물(人物)·명환(名宦)[중요한 자리에 있는 벼슬]·유행(儒行)[유학에 기반을 둔 행위]·절의(節義)·효열(孝烈)·총묘(塚墓)·고적(古蹟)·제영(題詠)·부사례(附事例) 등으로 되어 있으며, 진보(鎭堡)·역원(驛院)·봉수(烽燧)·제언(堤堰) 등의 항목은 ‘無(없음)’로 기록되어 있다.
내용 면에서는 이전의 전의읍지인 『전성지』[1854년 간행본] 학교조와 비교하여 향교와 관련된 중수 기록도 살펴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1788년 6월부터 1791년 5월까지 대성전·명륜당·외삼문을 현감 정동원(鄭東元)이 중수하였고, 『유림대사전』에는 1865년(고종 2)에 명륜당 중수와 1866년 대성전 중수가 있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1867년이라고 되어 있으나 정확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전성지』의 「전성현 읍지」편에 舊邑治抂今鄕校之西云而文獻無微年代不可攷[옛 관청은 지금의 향교 서쪽에 있었다고 하지만 증거할 만한 문헌이 없고 어느 때인지 연대도 알 수 없다.]라고 쓰여 있다. 이 ‘향교 서쪽’이라는 기록이 맞다면 현재 전의의 중심축은 왼쪽으로 오백보는 이동하게 되므로 변천 이전의 장시 ‘유수기장’은 ‘남쪽으로 3리의 거리’라는 표현이 합당하다.
「공해(公廨)」편과 『충청남도읍지』(1899) 속의 「전의군아사도」와 비교 및 대조해서 다른 지역에 비하여 전의현 관아의 구조와 배치가 자세히 그려져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를 통하여 동헌, 객사, 길청[작청(作廳). 군아(郡衙)에서 구실아치가 일을 보던 곳], 향청, 옥, 내아, 사창, 창고와 같은 건물 배치를 잘 살펴볼 수 있다.
또한 관아의 기능을 탐구하면 전의현의 행정 조직도 연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동헌은 현감의 집무소이고, 향청은 전의 지역 양반인 좌수 및 별감의 집무소이고, 길청은 이방을 비롯한 아전들의 집무소인 점을 알 수 있으며, 지방은 수령과 지방 양반 및 향리들이 연합하여 통치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길청(作廳)은 이방을 비롯한 아전들이 모여서 소관 업무를 처리하던 청사로, 작청의 이두식 독법이다.
교량(橋梁)편을 통하여 당리점이 옛 장시(場市)인 유수기장시의 옛 위치에 합당한 것인지에 대한 추론도 할 수 있다. 『전성지』의 「교량(橋梁)」편에 외곽 지역으로 나가는 6개의 다리 중 유수외교(柳藪外橋)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학교(學校)」편의 전의향교 연혁과 관련된 기사는 『학교등록』 경종 3년(1723) 5월 5일조에 나타난다. 이에 따르면 충청도 감사 이의만(李宜晩)이 이산향교(尼山鄕校)의 동무위판에 뱀이 나타났다고 언급하면서 지난 을해년(1695년) 전의향교의 위판에 뱀이 들어 있던 변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다. 이때 위안제를 지내지 않았으나 예에 따라 위안제를 거행할 것을 청하여 허락받았다고 한다. 1854년 간행된 전의현의 읍지인 『전성지』 학교조에 의하면 당시 전의향교에는 ‘서재 교생 30명, 교노(校奴) 7명, 교보(校保)·양보(良保) 10명, 사보(私保) 60명이 배속되어 있었고, 위전답(位田畓)으로는 구진(舊陳)[경작하지 않는 땅]이 61복3속이며, 사전(祀田)[경작하는 땅] 26부5속, 논42속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절의(節義)」편에는 사육신 박팽년, 「효열(孝烈)」편에는 ‘세종시(전의) 효자 김충열(金忠烈)[1585~1668]이 강릉김씨의 전의현 입향조인 김승로(金承露)의 9세손으로 아버지 김산두가 병으로 고생하자 동생 김신열(金信烈)과 함께 지성으로 간호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밖에 충신 김익정(金益精)과 김사준(金師俊) 외에도 홍직 정려(洪稙 旌閭), 삼쌍 효열문(三雙 孝烈門), 효자 박이명(朴履命)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 고종 초까지의 충청남도 지역 내 읍지를 원본 그대로 충실하게 수집 및 수록하고 있어 충청남도의 읍지 전통을 되살리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된 『전의읍지』는 1901년 등사본 형태로 편찬되었다. 모본이 되는 읍지가 있는지 여부를 추정해 보았으나 현재로는 분명하지 않다. 오히려 수록된 읍지의 편찬 시기와 항목 구성 등이 다양한 것으로 보아 1870년대까지 편찬된 개별 읍지를 선별해서 읍지로 엮었다는 추정이 더 설득력이 있다.
예전의 읍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이 책이 수집된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