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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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固城李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임선빈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3년 - 청안재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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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고성이씨 본관 - 경상남도 고성군 |
세거|집성지 | 고성이씨 집성지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신안리 |
묘소|세장지 | 청안재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신안리 |
성씨 시조 | 이황 |
입향 시조 | 이배 |
[정의]
이황을 시조로 하고 이배를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세종특별자치시의 고성이씨(固城李氏)는 사암공파 이배가 17세기 초에 이괄의 난과 연루될 것을 우려하여 처향으로 입향하여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신안리가 후손들의 집성촌이다.
[연원]
고성이씨 시조 이황(李璜)은 중국 한나라 무제 때 군사를 이끌고 우리나라에 왔다가 눌러 살게 된 이반(李槃)의 24세손이다. 고려 덕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부사를 지냈다. 1033년 거란이 침입하였을 때 세운 공(功)으로 이부상서에 올라 철령군(鐵嶺君)[철령은 철성(鐵城), 현재 고성의 별호]에 봉하여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이황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고성[또는 철성]으로 삼아 세계(世系)[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를 이었다.
[입향 경위]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신안리에 거주하고 있는 고성이씨 사암공파는 파조가 시조 이황의 12세손인 이지(李墀)[1420~1486]이다. 이지는 문종조에 음서로 출사하였고, 1457년(세조 3)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정난원종공신·좌리원종공신 등에 참여하였다. 경외의 여러 관직을 거쳐 직예문관사에까지 올랐으며, 아들 이육(李陸)이 현달(顯達)[벼슬, 명성, 덕망이 높아서 이름이 세상에 드러남]하여 가선대부 예조참판에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되었다. 사암(思庵)은 이지의 호다.
고성이씨의 신안리 입향조는 청안현감을 지낸 이배(李培)로 알려져 있으며, 17세기 초에 이괄(李适)의 난을 피해 처향(妻鄕)[아내의 관향]으로 온 것으로 추정된다.
1729년에 편찬된 필사본 고성이씨 족보에 의하면 이괄과 이배는 모두 사암공 이지의 5세손으로, 10촌간이다. 계보를 정리해 보면 이괄의 선계는 이지-제1자[장남] 이륙-제2자[차남] 이교(李嶠)-제2자 이택(李澤)-제3자[3남] 이제(李磾)-제3자 이괄로 이어진다. 이배의 선계는 이지-제4자[4남] 이맥(李陌)-제1자 이린(李嶙)-제1자 이활(李活)-제1자 이침(李碪)-제3자 이배로 이어진다.
[현황]
이괄의 난이 진압된 후 고성이씨 가운데 이괄과 가까운 친척들은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 뿔뿔이 흩어졌고, 일부가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 후손이 번창하면서 조치원읍 신안리에도 자리 잡게 되었다. 현재 신안리에 살고 있는 후손의 14대조부터 11대조의 묘소가 서면에 있고 10대 이하는 신안1리 안산에 묘소가 있다고 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신안1리는 고성이씨의 집성촌이었으나 그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1990년대 초에 대부분이 대전광역시와 충청북도 청주시 등지로 옮겨가고 현재는 몇 가구만 남아 있다. 후손 가운데 합참의장, 국방부장관 등을 역임한 이기백(李基百)[1930~] 육군대장이 있다.
[관련 유적]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신안리에 고성이씨의 사당 겸 재실인 청안재(淸安齋)가 위치하고 있다. 청안재는 서면에 입향한 이배의 호를 딴 것으로, 2003년에 건립되었다. 고성이씨 선산이 있는 연서면 용암리 위지울 마을에는 입향조의 초장지인 묘소가 있고, 입향조 선대들의 천장(遷葬)[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김]한 묘지 등이 조성되어 있다. 각 묘소 앞에는 구비와 신비, 상석과 문인석, 석주 등이 있다. 천장과 함께 신도비도 옮겨 와 묘역 입구에 세워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