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3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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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适-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624년 1월 24일 - 이괄의 난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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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624년 2월 22일 - 이괄의 난 진압 |
발생|시작 장소 | 이괄의 난 - 평안도 영변 |
종결 장소 | 공산성 - 공주시 금성동 |
성격 |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문회|허통|이우|이괄의 아들 이전|한명련|정충신|기자헌|현집|이시언 |
[정의]
조선 후기 인조반정 직후 논공행상 불만과 반란을 일으킨다는 무고를 받은 이괄이 일으킨 내란 사건.
[개설]
이괄(李适)[1587~1624]의 난은 1624년(인조 2)에 이괄이 조선 왕가 종실 흥안군 이제를 왕으로 추대하며 일으킨 반란이다.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무고를 당하자 난을 일으켜 한양까지 함락시켰다. 조선 내란으로는 처음으로 왕을 도성에서 피란시킨 전무후무한 난이기도 하다.
[역사적 배경]
1623년(인조 1) 서인 세력은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하였다. 이괄은 반정이 성공한 뒤에 임지로 돌아가지 않고 좌포도대장으로서 한성부의 치안 유지를 담당했다. 하지만 김유, 이귀 등 서인계 공신들은 이괄을 배척하고 견제하였다. 인조반정에 대한 논공행상 과정에서도 이괄은 김유와 이귀, 김자점 등보다 한 등급 아래인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봉해지는 데 그쳤다. 이괄의 아들과 동생은 논공행상에서 제외되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괄은 반정 2개월 뒤 후금이 침입할 우려가 있다 하여 도원수 장만(張晩)의 추천으로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된 관서(關西)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이괄은 평안도 영변(寧邊)에 주둔하면서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그러던 중 1624년 음력 1월 문회·허통·이우 등이 이괄과 이괄의 아들 이전, 한명련, 정충신, 기자헌, 현집, 이시언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하였다. 하지만 역모의 단서는 찾지 못하였고 대신 이괄의 아들 이전을 서울로 압송하기로 하였다.
이괄은 기익헌, 한명련 등과 함께 압송하러 온 사람들을 죽이고 1624년 항왜병 100명을 선봉장으로 하여 1만 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경과]
이괄의 군대는 1만여 명의 반란군을 이끌고 영변에서 남하하며 승승장구하였으나 장만(張晩) 휘하의 관군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말았다.
1만여 명의 반군이 평양으로 진격하자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삼고 형조판서 이시발과 대사간 정엽을 부사, 이수일을 평안 병사 겸 부원수로 삼아 반군 토벌에 나섰다. 토벌군과 장만의 추격군이 서흥(瑞興)에서 합류하여 저탄(猪灘)에서 반란군과 일대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반군은 이를 돌파하고 개성을 거쳐 벽제(碧蹄)까지 이르렀다. 인조가 공주로 피란을 떠나자 반란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선조의 열 번째 아들인 흥안군(興安君) 제(堤)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반란군은 장만 휘하의 관군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면서 이천으로 도망하였다. 결국 반군 기익헌·이수백 등이 이괄·한명련 등 9명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하면서 난은 진압되었다.
이괄군이 개성을 지나 3월 26일(음력 2월 8일) 임진강을 건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조는 그날 밤 서울을 버리고 수원에 도착하였다. 천안에서 반란군의 평정 소식을 접하였으나 패주하는 반란군이 이천 쪽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공주로 피란을 갔다.
이로써 이괄의 난은 평정되고, 이괄 등의 수급(首級)이 공주의 행재소(行在所)에 이른 뒤 인조는 6일 동안 공주에서 난을 피하였다. 음력 2월 18일에는 총독부사 최명길이 전의현 관아에서 어가(御駕)를 맞아 하루를 쉬게 하였다. 인조는 22일 환도한 뒤 이괄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운 장만·정충신·남이흥(南以興) 등 32인을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포상하고 난 수습책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괄의 난이 당시 국내외 정세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이괄의 난 때 인조가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밤절에서 머물러 있는 동안 연기 출신 인물들이 난 진압에 공을 세웠다.
[의의와 평가]
이괄의 난을 진압한 후 서인 정권은 호위청 군관의 수를 배로 늘리고 어영청과 총융청을 설치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도성 부근에 피신처가 없어 공주까지 피란하여야 한 사실을 들어 남한산성 축조를 신속하게 진행하기도 하였다. 이괄의 난 이후 기내(畿內) 군사력의 정비가 일부 이루어졌지만 서북로를 비롯한 지방군의 정비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맞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