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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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山金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선빈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541년(중종 36) - 김정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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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643년(인조 21) - 김종발 출생 |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572년(선조 5) - 김정수 사망 |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712년(숙종 38) - 김종발 사망 |
본관 | 광산김씨 본관 - 광주광역시 평장동 |
입향지 | 광산김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
입향지 | 광산김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부강리 |
세거|집성지 | 광산김씨 세거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노송리 |
묘소|세장지 | 김종발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노송리 망향동 |
성씨 시조 | 김흥광 |
입향 시조 | 김정수|김종발|김재윤|김재원 |
[정의]
김흥광을 시조로 하고 김정수, 김종발, 김재윤 등을 각각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세종특별자치시의 광산김씨는 문숙공파와 양간공파 후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문숙공파는 16세기 중엽 김정수가 전의에 처음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양간공파는 18세기 초에 김종발이 이웃 고을 목천에서 처향(妻鄕)[아내의 관향]인 동면으로 입향하여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연원]
광산김씨의 시조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후기 신무왕의 셋째 왕자로 태어났다. 고려가 삼한을 통일하자 신라의 비운을 예견하고 무주(武州)[현 광주광역시 평장동]의 서일동에 은거(隱居)[세상을 피해 숨어서 삶]함으로써 광산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시조 김흥광의 후손들이 14세 이후 여러 계파로 분파되는데 문정공파, 문숙공파, 양간공파, 낭장공파, 사온서직장공파의 5개 파로 분류된다. 세종특별자치시에 정착한 계파는 주로 14세손에서 분파되어 시작되는 문숙공파와 양간공파 후손들이다.
[입향 경위]
문숙공파는 김주정(金周鼎)[1228~1290]이 파조이다. 김주정은 음서로 부성위(富城尉)가 된 후 1264년(원종 5) 5월 과거에 수석으로 합격하였으며, 1278년(충렬왕 4) 충렬왕이 원나라에 갈 때 우부승지로서 수행하였다. 이후 응방도감사(鷹坊都監使) 진변만호(鎭邊萬戶) 등을 역임하였다. 문숙(文肅)은 김주정의 시호이다.
16세기 중엽 전의에 처음 거주하기 시작한 김정수(金廷秀)[1541~1572]는 문숙공 김주정의 손자인 김승진(金承晉) 계열이다. 김승진은 벼슬이 상호군(上護軍)에 오르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책봉되었기 때문에 김승진의 후손들을 상호군파라고도 일컫는다. 김정수 선대는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살았으며, 김정수의 전의 입향 사유는 자세하지 않다. 족보에는 김정수가 ‘전의에 처음 거주하기 시작하였다[始居全義]’고 기록되어 있으며, 후손들은 ‘전의파’라고 일컬었다.
양간공파는 김연(金璉)[1215~1291]이 파조이다. 김연은 고려 충렬왕 때 문신이었다. 벼슬이 광정대부 첨의시랑 찬성사에 이르렀고, 양간(良簡)은 시호이다. 동면 노송리에 세거한 광산김씨는 양간공파의 후손 중 소파(小派)로는 평양서윤을 지낸 김광주(金光籌)를 파조로 하는 평양서윤공파이다. 입향조는 훈장(訓長)을 지낸 김종발(金鐘發)[1643~1712]이다. 김종발은 이웃 고을인 목천에서 거주하다가 첫째 부인 밀양박씨를 후사 없이 잃었고, 노송리에 세거하고 있던 김승인(金承仁)의 딸 경주김씨를 둘째 부인으로 맞으면서 이거(移居)하였다. 이후 김종발의 후손들은 번창하여 현재 노송리를 비롯한 곳곳에 200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김종발의 묘는 노송리 망향동에 있으며, 후손으로는 김종발의 7세손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김재신(金在新)이 있다.
한편 부강면 부강리에도 광산김씨 양간공파가 살았다. 이들은 진잠 양지촌에서 200여 년 전에 부강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입향조는 김재윤·김재원 형제로 추정된다. 후손들이 기억하고 있는 입향 사유는 부강 수로를 통한 상업 활동을 하다가 부강으로 입향하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