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559 |
---|---|
한자 | 長水黃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윤윤희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400년대 중후반 - 황첩 출생 |
---|---|
입향 시기/일시 | 1500년대 초반 - 황첩 입향 |
본관 | 장수황씨 본관 - 전라북도 장수군 |
입향지 | 장수황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명학리 |연기면 눌왕리 |
세거|집성지 | 장수황씨 집성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명학리 |연기면 눌왕리 |
묘소|세장지 | 황첩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등곡리 존들마을 |
묘소|세장지 | 태암서원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명학리 |
성씨 시조 | 황경 |
입향 시조 | 황첩 |
[정의]
황경을 시조로 하고 황첩을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황경(黃瓊)을 시조(始祖)로 하고 황첩(黃堞)을 입향조로 하는 장수황씨는 1500년대 초반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명학리에 입향한 이래 지금까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연원]
시조 황경은 통일신라 경순왕의 사위로, 시중(侍中)을 지냈다 한다. 이후 중간 계대가 실전되어 황석부(黃石富)를 1세조로 하고 장수를 본관(本貫)[시조가 난 곳]으로 하여 세계(世系)[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를 이었다.
후손 황희(黃喜)는 문과에 급제하고 고려가 망하자 은둔 생활을 하였으나 조선 세종 대 두루 요직을 역임하여 종묘에 배향(配享)[공로나 학덕이 있는 사람의 위패를 종묘에 모심]되었다.
황희의 아들 대에 이르러 장수황씨는 호안공파(胡安公派), 소윤공파(少尹公派), 열성공파(烈成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로 분파되었다.
[입향 경위]
연동면 명학리 장수황씨는 호안공파이며 황첩을 입향조로 삼고 있다. 황첩은 음직으로 사직(司直)을 지냈고 중종 대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병조판서(兵曹參判)에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되었다.
황첩은 연산군 말기에 어지러운 정세를 피해 은거(隱居)[세상을 피하여 숨어 삶]할 곳을 찾아 전라도로 가던 중 황우산(黃牛山)을 지나게 되었다. 황씨는 산세에 호감을 느껴 황우산에 사는 것이 적격이라 여겨 황우재에 터전을 잡았다고 한다.
연기면 눌왕리 장수황씨의 세거는 1600년대 황윤(黃狁)의 부인 장수장씨가 정착하여 시작되었다. 원래 명학리에 살았으나 명학리 일대에 전염병이 돌아 황윤이 세상을 떠나자 황윤의 부인 장수장씨는 아들을 데리고 눌왕리에 피신하여 왔다. 이후 후손들이 번성하여 성구공파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현황]
1988년 명학리 장수황씨는 44가구, 눌왕리 장수황씨는 15가구가 거주한 것으로 확인된다.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연기군의 장수황씨는 1985년 154가구 622명, 2002년 148가구 427명이다. 2015년 세종특별자치시의 장수황씨는 931명으로 남자 446명, 여자 485명이다.
[관련 유적]
연동면 명학리에 있던 태암서원(台巖書院)은 1856년 연기 사림들이 건립하여 황희를 제향(祭享)[제사의 높임말]하였다.
1871년 서원이 훼철(毁撤)[헐어서 치워 버림]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장수황씨 후손들이 중건을 기대하는 태암서원 유적지를 세웠다.
또한 향토 문학적 자료로서 소중한 황헌(黃櫶)의 문집 『국은사고(菊隱私稿)』와 황봉현(黃鳳顯)의 문집 『학남사고(鶴南私稿)』가 전해지고 있다.
연동면 명학리 장수황씨는 매년 음력 10월 10일 부강면 등곡리 존들에 있는 황첩 묘역에서 향사(享祀)[제사를 지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