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5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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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坡平尹氏 |
이칭/별칭 | 영평윤씨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선빈 |
본관 | 파평윤씨 -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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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파평윤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봉암리 |전의면 신정리|장군면 하봉리 |
세거|집성지 | 파평윤씨 세거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봉암리 |전의면 신정리|장군면 하봉리 |
묘소|세장지 | 윤기환 묘와 재실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봉암리 요옥동 |
묘소|세장지 | 윤해 묘와 재실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노곡리 운주산 |
묘소|세장지 | 인동장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신정리 |
묘소|세장지 | 열녀 경주최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봉암리 |
성씨 시조 | 윤신달 |
입향 시조 | 윤려|윤기환|윤해 |
[정의]
윤신달을 시조로 하고 윤려, 윤기환, 윤해를 각각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세종특별자치시의 파평윤씨는 연서면 봉암리에 태위공파 윤기환, 전의면 신정리에 소정공파 윤해, 장군면 하봉리에 윤려 등이 입향하여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연원]
파평윤씨(坡平尹氏)의 시조 윤신달(尹莘達)은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공을 세워 고려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영평현(鈴平縣) 개국백(開國伯)에 봉하여졌다. 영평은 파평(坡平)의 이칭이다. 이후 후손들은 파평을 본관(本貫)으로 하였다. 윤신달과 관련해서는 파평현 용연(龍淵)에 있던 옥함에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부이므로 그전의 다른 이야기나 모습은 알 수 없다. 파평현을 근거지로 삼아 토착화하여 성장한 파평윤씨는 고려조 이후 계속하여 가문의 번성을 이루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418명, 정승 11명이나 배출한 큰 성씨로 성장하였다.
[입향 경위]
연서면 봉암리에 거주하는 파평윤씨는 태위공파(太尉公派)이다. 파조는 12세 윤안비(尹安庇)로 1294년(충렬왕 20)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대언(代言)을 지냈다.
파평윤씨 태위공파의 입향조는 윤기환(尹起煥)으로 윤기환의 부인은 파평윤씨보다 먼저 봉암리에 거주하고 있던 밀양박씨다. 1504년 갑자사화에서 윤기환의 고조부 윤수(尹粹)와 증조부 윤달몽(尹達蒙) 등이 부관참시(剖棺斬屍)[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난 사람을 극형에 처하는 일]를 당하는 등 집안이 피화를 입자 이를 피해 유성 상갑동 일대에 거주하는 소정공파의 19세손 일가를 찾아 피란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다시 공주 장기면 갈산리 일대로 이거(移居)하였다가 다시 봉암리 요옥동으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고 한다. 욧골이라고 불리는 봉암리 요옥동에 파평윤씨들의 종산(宗山)[한 문중의 조상을 모신 산]이 있고 선조들의 묘가 주로 봉암리에 안장되어 있다. 마을 주민들은 봉암2리를 파평윤씨 묏자리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전의면 신정리의 파평윤씨는 소정공파(昭靖公派)로 윤곤(尹坤)[?~1422]을 파조로 한다. 윤곤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400년(정종 2) 이방원(李芳遠)이 동복형인 이방간(李芳幹)이 일으킨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한 공(功)으로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책록되고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 파평군(坡平君)에 봉작(封爵)[제후로 봉하고 관직을 줌]되었다. 관직은 평안도관찰사, 이조판서, 우참찬 등을 역임하였고 시호(諡號)[제왕이나 재상,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는 소정(昭靖)이다.
파평윤씨 소정공파의 입향조는 윤해(尹垓)로 윤곤의 8세손이다. 윤해는 원래 경기도 파주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당파 싸움에 염증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자연과 더불어 은둔 생활을 하기 위해 전의현 신정리 음달말로 낙향하였다고 하는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장군면 하봉리 파평윤씨는 500여 년 전 과천현감을 지냈던 19세손 윤려(尹礪)가 낙향하면서 지금까지 터전을 이루고 있다. 낙향한 정확한 사유는 알 수 없으나, 연산군의 실정으로 낙향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윤려는 중종 연간에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으로 이조참판에 추증(追贈)[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죽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벼슬을 주던 일]되는데 연산군 시절의 피해에 대한 보상으로 추측된다. 윤려의 생몰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성종 연간에 태어나서 연산군 재위 시기에 사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유적]
윤기환의 묘와 재실은 연서면 봉암리 요옥동에 있고 윤해의 묘와 재실은 전의면 노곡리 운주산에 있다. 윤려의 묘는 하봉리에 인접해 있는 송정리가 초장(草葬)[시체를 짚으로 싸서 임시로 매장함]지이다. 전의면 신정리에는 윤신규(尹信圭)[1878~1817]의 처 인동장씨(仁同張氏)[?~1817]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던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 등을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가 있었으나 2019년 현재 건물은 허물어져 남아 있지 않고 터만 있다. 그러나 후손 집안에는 관련 고문서가 10여 점 보관되어 있다. 연서면 봉암리에는 윤태풍(尹泰豊)의 처 경주최씨(慶州崔氏)[1842~1866]의 정려가 있다. 열녀 경주최씨 정려는 2014년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25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