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588 |
---|---|
한자 | 錦南面道岩里和順崔氏司評公派集姓村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도암리 |
시대 |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도암리 있는 화순 최씨 사평공파 집성촌.
[개설]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도암리는 화순최씨 사평공파 집성촌으로, 11세손 최은(崔垠)이 회덕에서 도암리로 입향한 이래 대대로 집성촌을 이루어 왔다.
[입향경위]
금남면 도암리 화순최씨 사평공파(司評公派)의 입향조는 최은으로, 도승지를 지낸 최중온(崔重溫)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최은은 상서원 직장을 지냈는데 연산군 때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벼슬을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벼슬을 버리고 회덕현 목현(木峴)으로 낙향한 것으로 전하여진다.
최은은 말년에 도암리로 와 모인당(慕忍堂)을 세우고 수도와 강학을 하면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현황]
현재 도암리에 세거하는 화순최씨는 입향조 최은의 4세손 사평공(司評公) 최기수(崔杞秀)를 파조로 한다. 도암리 화순최씨는 사평공 최기수의 둘째 아들 최필민(崔必敏)[1624~1670]의 자손들이다.
마을 이름 도암은 최기수가 도암리에 와서 수도하며 강학에 힘써 예의 도덕이 잘 행해져 도동 또는 도곡(道谷)으로 칭하여 오다가 도곡과 이웃한 명암리(嗚岩里)의 글자를 합하여 칭하게 되었다.
[인물]
최기수는 인조의 공주 파천(播遷)[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하던 일] 때 인조를 도와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된 인물로, 용모와 체격이 크고 성품이 온화하였다고 한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 쌍수산성으로 파천하자 의병을 모집하여 나아가 국란을 구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공주목사 송흥주(宋興周)가 천거(薦據)[어떤 일을 맡아 할 수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 쓰도록 소개하거나 추천함]하여 행재소에 나아가니 인조가 칭찬하며 통훈대부장례원사평에 임명하였다.
난이 진압되고 인조가 환궁한 뒤 여러 차례 불렀으나 최기수는 국란이 이미 평정되었으니 벼슬길보다 초야에 묻혀 시문을 즐김이 낫다 하며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원종공신에 들었으며, 최기수의 행적이 쌍수정사적비(雙樹亭史蹟碑)와 『공산지(公山誌)』에 실려 있다.
[관련유적]
금남면 도암리 화순최씨 참판공 재실(齋室)인 모인당은 최은이 말년에 수도와 강학을 하면서 여생을 보낸 곳으로, 1669년(현종 10)에 건립하였다.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도암리 중근봉 아래에 위치한다.
본래 모인당은 중국 순임금의 업적을 사모한 데서 나온 모(慕) 자와 당나라 때 서로 참아 가며 9대가 화목하게 한집에서 살았다는 장공예(張公藝)의 참을 인(忍) 자를 취해 지은 이름이라고 전하여진다. 몇 번의 개축과 중수를 거쳐 잘 보존되고 있다.
현재의 모인당은 1928년에 1669년(현종 10) 원래의 모습대로 중건하여 최한정·최중온·최은 3대의 향사(享祀)[제사를 지냄]를 봉행(奉行)하는 재실(齋室)로 사용하고 있다.
재실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내부에는 1856년(철종 7) 이원건이 기록한 『모인당중건기』 외에 중수기와 이건기들이 걸려 있다.
효자 최덕렬(崔德烈)[1763~1835]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 최덕렬 정려도 있다. 최덕렬은 사평공의 7세손으로, 자는 윤백(潤伯)이다. 효성과 우애가 남달라 어려서부터 모친이 병이 나자 정성껏 간호하였으며, 돌아가시려 하자 손을 베어 피를 드려 3일간 목숨을 연장시켰다고 한다. 사림에서 효자 표창을 하려 하였는데 최덕렬의 아버지가 이를 고사하여 표창하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1996년 후손들이 도암리 마을회관 뒤쪽에 효행 실적비와 정문(旌門)[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을 세워 놓았다.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이며, 맞배지붕이다.
[의의와 평가]
금남면 도암리는 현재 화순최씨 집성촌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인근 금남면 성덕리·신촌리·금천리·봉암리 등에도 화순최씨가 많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