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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597
한자 李混
영어공식명칭 Yi Hon
이칭/별칭 몽암,거화,일우,태초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이상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251년(고종 38)연표보기 - 이혼 출생
활동 시기/일시 1268년(원종 9) - 이혼 과거 급제
활동 시기/일시 1279년(충렬왕 5) - 이혼 우정언 역임
활동 시기/일시 1292년(충렬왕 18) - 이혼 부지밀직사사 문학사사 승지가 됨
활동 시기/일시 1294년(충렬왕 20) - 이혼 서북면도지휘사가 됨
활동 시기/일시 1295년(충렬왕 21) - 이혼 동지밀직사사가 됨
활동 시기/일시 1297년(충렬왕 23) - 이혼 파직
활동 시기/일시 1298년(충렬왕 24) - 이혼 서경유수 평양부윤이 됨
활동 시기/일시 1299년(충렬왕 25) - 이혼 파직
활동 시기/일시 1303년(충렬왕 29) - 이혼 기밀직사가 됨
활동 시기/일시 1307년(충렬왕 33) - 이혼 도첨의찬성사 판판도사사에 임명됨
활동 시기/일시 1308년(충렬왕 34) - 이혼 대사백에 봉하여짐
몰년 시기/일시 1312년(충선왕 4)연표보기 - 이혼 사망
추모 시기/일시 1312년(충선왕 4) - 이혼 사망 후 상신으로 문장이라는 시호를 받음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전의
대표 관직 도첨의찬성사 판판도사사|대사백

[정의]

고려 후기 세종 지역 출신의 문신.

[가계]

이혼(李混)[1252~1312]의 자는 거화(去華)·일우(一宇)·태초(太初), 호는 몽암(蒙菴)이다. 본관은 전의(全義)인데 뒤에 예안백(禮安伯)에 봉해짐으로써 분파하여 예안이씨 시조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보승별장(保勝別將)을 지낸 이순(李順)이고, 아버지는 응양군대장군(鷹揚軍大將軍)을 지낸 이천(李仟)이다. 어머니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김기손(金起孫)[?~1268]의 딸이며, 아들은 성균악정(成均樂正)을 지낸 이이(李異)이다.

[활동 사항]

이혼은 1268년(원종 9) 17세로 과거에 급제하여 광주참군(廣州參軍)이 되고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국학학정(國學學正)이 되었다.

충렬왕(忠烈王) 때 첨의사인 우부승지(僉議舍人右副承旨)를 거쳐 1289년(충렬왕 15) 국자시(國子試)의 시험관으로서 김승인(金承印), 최운(崔雲) 등 70명을 선발하였다. 1292년(충렬왕 18) 부지밀직사사 문학학사 승지(副知密直司事文學學士承旨)가 되었으나 언사(言事)로 여러 번 파면되었다. 1294년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를 거쳐 이듬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1296년 당시 충렬왕이 탐라(耽羅)의 민호(民戶)를 편성해서 내고(內庫)에 예속시키려고 하자 도당(都堂)에서 이혼이 불가함을 주장하였다. “탐라(耽羅)의 사람들은 성질이 난폭하고 사납기 때문에 왕명이라 핑계하고 그들을 들볶아서는 아니 됩니다. 요사이 왕명을 핑계대고 출장 가는 사자들이 끊이지 않아 백성들이 피해를 보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도평의사(都評議司) 명의의 공문을 내려 도평의사를 경유해 역마를 사용하는 권한을 지급받은 뒤에 가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여 왕의 노여움을 샀다.

충렬왕이 순마관(巡馬官)에게 명하여 당리(堂吏) 이우(李紆)를 잡아 의견을 제일 먼저 내놓은 관리가 누구인지 묻게 하였다. 이우가 전적으로 자신이 행한 것이라고 축소 자백하자 충렬왕이 더욱 노해 만호(萬戶) 고종수(高宗秀)를 시켜 반드시 진상을 밝히게 하였다. 혹독한 고문을 당한 이우가 자복(自服)[저지른 죄를 자백하고 복종함]하고 이혼을 지목하자 격노한 충렬왕은 이혼을 수감하고 이듬해에 결국 발의자로 지목하여 파직시켰다.

이혼은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지밀직사사 세자원빈(知密直司事世子元賓)이 되었고, 1298년 관제 개편에 따라 서경유수 평양부윤(西京留守平壤府尹)이 되고 전조판서집현전대학사(銓曹判書集賢殿大學士) 수국사(修國史)가 되었다.

1299년 다시 파직을 당하였으나 1303년 지밀직사사로 기용되어 이듬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고, 1307년(충렬왕 33) 왕유소(王惟紹)와 송방영(宋邦英)이 처형되고 충선왕(忠宣王)이 국정을 장악하게 되자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에 임명되었다.

1307년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에 가서 연경에 있던 충선왕과 함께 관리 선발 방식에 대하여 의논한 후 관제 개혁을 기획하여 밀직(密直), 중방(重房), 내시(內侍), 3관(三官), 5군(五軍)을 모두 폐지한다는 내용을 결정하여 귀국하였다. 1308년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즉위하자 공(功)을 인정받아 대사백(大詞伯)에 봉하여지고 벽상삼한공신(壁上三韓功臣)에 녹훈(錄勳)[훈공을 장부나 문서에 기록함]되었다.

이후 관제 개혁 추진으로 실각당한 중신들로부터 원망을 받아 오던 중 비빈(妃嬪) 숙비(淑妃)의 미움을 받아 회주(淮州)·예주(禮州) 등지의 외직인 목사로 좌천되기도 하였으며, 다시 소환되어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복귀하는 등 부침을 거듭하다 나이가 많음을 들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성품은 너그럽고 후하였으나 전선(銓選)으로 재직할 때 적지 않은 재산을 모았다는 흠결이 있다.

이혼은 한때 정해(鄭瑎)와 함께 정방(政房)에 있으면서 서로 밀어주는 사이였다. 어느 날 이혼이 정해에게 “사람들은 그대가 교묘히 처신한다고 말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정해가 이혼에게 “사람들은 그대가 청렴하지 못하다고 하는데 정말 그러한가?”라고 반문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혼은 시문에 능하고 단구(短句)[자수가 적은 글귀]에 더욱 재주가 있어 장·단구 몇 편의 시집이 세상에 전한다. 영해(寧海)에 귀양 갔을 때 바다에 떠 있는 뗏목으로 만든 「무고(舞鼓)」가 『악부(樂府)』에 전한다.

[상훈과 추모]

이혼이 1312년(충선왕 복위 4) 61세로 사망하자 상신[벼슬]으로 문장(文莊)이란 시호(諡號)[제왕이나 재상,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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