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3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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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영어공식명칭 | Goryeo Dynast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이현숙 |
[정의]
918년에서 1392년까지 고려 왕조가 지속된 시기 세종 지역의 역사.
[개설]
고려시대 세종특별자치시는 도읍지 개경으로부터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연기현(燕岐縣)과 전의현(全義縣)으로 나뉘어 있었다. 전의현은 940년(태조 23) 청주에 영속되었다가 조선 전기인 1395년(태조 4) 감무를 설치하였다. 연기현은 1018년(현종 9) 청주에 영속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임명하였으며, 나중에 목주감무(木州監務)를 겸하게 하였다. 고려 조정이 상주하는 외관[地方官]을 파견하여 지방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은 983년(성종 2) 12목을 설치하면서부터이다. 연기 지역은 12목 중에서 청주(淸州)와 공주(公州)에 일부 속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세종 지역의 행정 조직]
고려의 지방제도는 태조와 성종을 거쳐 현종대에 기본 골격을 마련하였다. 고려시대 지방제도 특징 중 하나는 주현(主縣)·속현(屬縣)체제를 들 수 있다. 고려의 군현제(郡縣制)는 중앙집권적 지방통치를 위하여 일정 크기의 군현을 구획하고 왕이 임명한 외관(外官)을 파견하여 지배하는 체제이다. 그런데 전국적으로 520여 개의 군현 가운데 외관이 파견된 주현이 130개에 불과하여 주현과 속현 숫자가 대략 1대3 정도 비율을 보이고 있다. 또한 군현제 영역에 더불어 향·소·부곡·장·처로 구성되는 부곡제 영역이 복합적인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시대 충청남도 지역은 청주목(淸州牧)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청주목은 연산·목주 2개의 속군과 7개의 속현[진주(鎭州), 전의(全義), 청천(淸川), 도안(道安), 청당(靑塘), 연기(燕岐), 회인(懷仁)]을 두고 1지사부, 2지사군, 1현령관을 청주목의 관할 하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영군 관계는 행정계통상의 형식적인 관계였다. 행정명령의 전달, 조부(租賦) 수취 및 역역(力役) 징발 등 군현제의 실질적인 기능은 주목(州牧)과 영군(領郡) 모두 동일하게 수행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유적 내용을 살필 수 있는 자료는 구체적이지 않다. 세종 지역은 940년(태조 23)에 연기현(燕岐縣)과 전의현(全義縣)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주로 청주나 공주에 영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고고학적인 문화상도 이들 인근 지역 문화와 비교할 수 있다.
[고려시대 세종 지역의 설화]
세종 지역 곳곳에 고려시대 관련 설화와 지명이 남아 있다.
고려 태조의 건국기에 연기 지역 인물로 주목할 수 있는 사람은 태사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 벼슬을 한 이도(李棹)이다. 태조가 남정(南征)할 때 호송하여 금강을 건널 수 있게 한 공(功)으로 도(棹)의 이름을 하사받은 전의 사람으로, 전의이씨 시조가 되었다.
또한 연기면 세종리의 원수산(元帥山)은 1291년(충렬왕 17) 합단(哈丹)[거란]의 침입에 한희유(韓希愈)·김흔(金忻) 등이 나아가 정좌산(正左山) 아래에서 합단을 무찌른 전공을 기념하여 붙은 명칭이다.
양화리(陽化里)[현 세종특별자치시의 연기면 세종리] 일대는 고려가 무너진 후 전서(典書) 임난수(林蘭秀)가 삼기촌(三岐村)[현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에 은둔하면서 여생을 보낸 곳으로도 주목된다.
[세종 지역의 고려시대 유적]
세종 지역에서 조사된 고려시대 유적은 행정중심복합도시 일대의 유적과 세종특별자치시 북동쪽에 위치하는 청주 오송유적 일대에서 조사된 유적으로 크게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연기현과 전의현이 북동쪽과 남쪽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을 함께 검토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동안 세종 지역에서 조사된 고려시대 유구는 건물지·수혈주거지·수혈유구·기와가마 등 생활유구와 돌덧널무덤[석곽묘(石棺墓)]·널무덤[토광묘(土壙墓)] 등 분묘유적이 있으며, 분묘유적의 조사 사례가 많다. 연기 갈운리유적과 송원리유적, 4-1,2 생활권의 석삼리·장재리·반곡동 집현리 일원에서 10세기 후반~13세기 후반까지 지속적으로 조성된 고려시대 널무덤과 돌덧널무덤이 조사되었다. 전기에 돌덧널무덤을 주로 사용하다가 후기로 갈수록 널무덤 사용이 늘어나는 것으로 확인된다. 연동면 용호리 용산유적에서는 6기의 기와가마가 조사되었다. 기와가마들은 고려시대 전기[10세기 중반~12세기]에 운영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리고 4-1 생활권의 괴화산 정상부에서는 산성으로 알려져 있던 곳에서 원형의 석축시설(石築施設)이 조사되었다.
[의의와 평가]
고려시대 세종 지역에서 조사된 유적은 집중적으로 군집을 이룬 모습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향후 고려시대 세종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