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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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忻 |
영어공식명칭 | Gim Heun |
이칭/별칭 | 수,상락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윤철원 |
[정의]
고려 후기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의 정좌산 전투에서 활약한 무신.
[개설]
1291년 5월 2일 연기현 정좌산에 주둔한 몽골의 반란군 합단적(合丹賊) 무리를 기습 공격하여 궤멸 상태로 몰아넣었으며 이후 죽전으로 도망간 잔적을 추격, 소탕한 공신이다.
[가계]
김흔(金忻)[1251~1309]은 고려조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둘째 아들이다.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다. 어릴 적 이름은 수(綏)이다.
[활동 사항]
김흔은 음서[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공신이나 전·현직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일]로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이 되었다. 1272년(원종 13) 부친 김방경을 따라 탐라에서 삼별초를 토벌하였고 1274년(원종 15) 일본 원정 때는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참가하고 진주목사를 지냈다. 1290년(충렬왕 16) 원나라 반군 합단적(合丹賊)이 침입하여 1291년(충렬왕 17) 연기(燕岐) 정좌산(正佐山)에 주둔하였다. 이에 여원 연합군은 김흔이 우군, 한희유가 좌군, 인후가 중군을 맡도록 하고 1291년(충렬왕 17) 5월 2일 새벽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나 적의 저항과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고려군의 공격이 부진하였는데 이에 김흔이 “후퇴하는 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독전(督戰)[싸움을 감독하고 사기를 북돋워 줌]하여 장졸 이석과 전득현이 앞서 나가 적의 선봉을 베자 합단적은 퇴각하기 시작하였고 연합군은 달아나는 적을 공주 금강까지 추격하였다. 이때 쓰러진 시체가 30여 리[약 12㎞]에 이르고 익사자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적의 주력은 거의 궤멸 상태가 되었으며 1,000여 명만 겨우 강을 건너 도망하였다. 5월 8일 도망갔던 합단적은 다시 원수산 방면으로 공격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한희유의 활약으로 패퇴하였다.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합단적은 죽전으로 도망하였으며 김흔이 추격하여 소탕함으로써 합단적의 난을 평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