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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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彭年 |
영어공식명칭 | Bak Paengnyeon |
이칭/별칭 | 인수,취금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강경윤 |
[정의]
조선 전기 세종 지역 출신의 문신으로 사육신 중 한 명.
[개설]
박팽년(朴彭年)[1417~1456]의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이다. 1432년(세종 14)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447년에 문과 중시에 을과로 다시 급제하였다.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이듬해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많은 관직을 역임 후 집현전에 들어가 당대 저명 인물들과 교유하였다.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단종복위운동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을 당하였다.
[가계]
박팽년의 아버지는 박중림, 어머니는 김익생(金益生)의 딸 안동김씨이다. 천안전씨(天安全氏) 전념(全念)의 딸과 혼인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전의면에 순천박씨가 살기 시작한 때는 박팽년의 할아버지인 박안생 때부터이다. 순천박씨는 공주·전의와 가까운 대전 유성 일대에 세거하다가 박안생이 전의 지역의 유력 성씨인 선(先) 안동김씨(安東金氏) 한성좌윤 학당(學堂) 김휴(金休)의 둘째 딸에게 장가들어 처가 근처로 이거를 하면서 전의 지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입향조 박안생, 박중림, 박팽년으로 이어지는 가계(家系)는 조선 절의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인물들을 배출하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활동 사항]
박팽년은 과거 급제 후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음 해에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세종 때에는 집현전에 들어가 당대 저명한 인사들과 학문을 닦았으며 여러 가지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다. 1455년(세조 1)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기 위해 일으킨 사건인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박팽년은 경회루(慶會樓)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였으나 성삼문의 만류로 후일을 도모하였다.
세조 즉위 후 충청도관찰사로 나아갔을 때의 일화가 전하여지는데 조정에 보내는 공문에 신(臣)이라고 칭한 일이 없었다. "나는 상왕[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형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성삼문,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김질(金礩)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탄로되어 체포되었다.
이에 박팽년은 성삼문 등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국문(鞠問)[중죄인을 신문하던 일]을 받았다. 박팽년은 심한 고문으로 인해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다음 날에는 다른 모의자들 역시 능지처사(凌遲處死)[대역죄를 범한 자에게 과하던 극형] 당하였다. 아버지 박중림 또한 능지처사되었고 동생 박대년(朴大年)과 아들 박헌(朴憲), 박순(朴珣), 박분(朴奮) 모두 처형되는 등 3대가 참화를 입는 한편 어머니, 처, 제수(弟嫂) 등은 대역부도(大逆不道)[임금이나 나라에 큰 죄를 지어 도리에 어긋나 있음. 또는 그런 짓]의 가족이라 하여 공신들의 노비로 끌려갔다.
[묘소]
박팽년의 묘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의 사육신 묘역에 있으며 1978년 사육신묘로 단장되었다. 장릉(莊陵)의 충신단(忠臣壇)에도 배향(配享)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힌다. 사육신의 신원(伸寃)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면서 박팽년은 1691년(숙종 17) 관작(官爵)[관직과 작위]을 회복하였으며, 1758년(영조 34)에는 이조판서에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