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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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許晩石 |
영어공식명칭 | Heo Manseo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윤철원 |
활동 시기/일시 | 1427년(세종 9) - 허만석 연기현감이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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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활동지 | 허만석 부임지 - 연기현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양천 |
대표 관직 | 연기현감 |
[정의]
조선 전기 연기현감을 지낸 문신.
[개설]
조선시대 세종 때 연기현감으로 부임하여 하천 제방을 축조한 연기현 명환(名宦)[중요한 자리에 있는 벼슬아치]이다.
[가계]
허만석의 본관(本貫)은 양천(陽川)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판도좌랑공 허관(許冠)이고 할아버지는 개성윤 허교(許僑), 아버지는 허응(許應), 어머니는 김해김씨이다.
[활동 사항]
허만석은 조선 세종조에 연기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재임 중 하천에 제방을 쌓은 공적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에는 명환(名宦)으로,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는 조선의 대표적인 치수 사례를 한 인물로 소개되었다. 1427년(세종9) 7월 21일자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의하면 허만석이 임금에게 사조하는 자리에서 세종은 “요즈음 가뭄 피해로 백성들이 산업을 잃었으니 그대는 마음을 다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라.”는 당부를 하였다. 연기현감에 부임한 허만석은 현재 조치원과 충청북도 청주와 경계를 이루는 조천(鳥川)에 제방을 쌓는 공사를 실시하였다. 이때 조성된 부지[현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평리와 상리]가 1770년 발간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청주목 장시(場市)’ 편에 소개된 조치원장(鳥致院場)이며, 1872년 『청주군읍지』에서 보이는 서강외일면 조치원리[일명 장대리]로 추정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연기현 명환’ 편에 “허만석은 근검을 위주로 정사를 보았다. 현북 15리 청주 경계에 큰 제방을 쌓고 도랑을 내어 1,000여 경의 논에 물을 댈 수 있게 하였다. 처음에 허만석이 제방 쌓는 일을 감독할 때에 청주 사람 1,100여 명이 몰려와 불손한 말을 하며 의자를 부수었다. 허만석이 큰 활로 그들을 쫓아내고 방죽 공사를 마무리하여 물을 댈 수 있는 덕분에 지금까지 칭송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내용이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목민심서(牧民心書)』 「공전육조」 천택 편에도 소개되는데 조선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성공적인 치수 사업을 한 인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