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46 |
---|---|
한자 | 田愚 |
영어공식명칭 | Jeon Woo |
이칭/별칭 | 자명,구산,추담,간재,고옹,양하왕인,경륜,경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안경희 |
출생 시기/일시 | 1841년(헌종 7) - 전우 출생 |
---|---|
몰년 시기/일시 | 1922년 - 전우 사망 |
출생지 | 전우 출생지 - 전라북도 전주시 |
묘소|단소 | 전우 묘소 -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기산리 산3 |
사당|배향지 | 숭덕사(덕성서원)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734-19 |
사당|배향지 | 계양사 -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 계화리 |
사당|배향지 | 의산사 - 경상남도 의령군 |
사당|배향지 | 용암사 - 전라북도 고창군 |
사당|배향지 | 태산사 - 전라북도 정읍시 |
성격 | 문신|학자 |
성별 | 남 |
본관 | 담양 |
[정의]
조선 후기에서 근대기에 활동하며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의 덕성서원에 배향된 학자.
[개설]
전우(田愚)[1841~1922]의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추담(秋潭)·간재(艮齋)·고옹(蠱翁)·양하왕인(陽下尫人)이다. 초명은 경륜(慶倫)·경길(慶佶)이다.
21세에 당시의 거유(巨儒|鉅儒)[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이름난 유학자] 신응조(申應朝)의 권유로 서울에서 직접 아산의 신창으로 임헌회(任憲晦)[1811~1876]를 찾아와 사제의 의를 맺었다.
그 후 임헌회가 죽을 때까지 아산·전의·연기·진천·상주·문천 등지를 따라가 살면서 학문을 연마하여 윤치중(尹致中)·서정순(徐政淳) 등과 함께 임헌회의 수제자가 되었다.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그대로 실현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조선 최후의 유학자로서 추앙받기도 한다. 그러나 처신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나라가 망하여도 의병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고, 파리장서(巴里長書)[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하여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한 사건]에도 참가하지 않았다고 하여 비판받기도 하였다.
한편 글씨를 잘 써서 골기(骨氣)[힘찬 필력] 있는 강건한 필체를 구사하였고, 강한 필획에 기개 높은 학자로서의 면모와 문기(文氣)[문장의 기세]가 서려 있다.
[가계]
전우의 본관(本貫)은 담양(潭陽)으로, 전녹생(田祿生)의 16세손이다. 아버지는 전재성(田在聖)으로, 전라북도 전주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전우는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났으며, 문장을 잘 지어 사대부들 사이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854년(철종 5) 부친을 따라 서울 정동과 삼청동, 순화동(順化洞) 등지에서 살았다. 이때부터 임헌회의 문하에서 20년 동안 성리학을 공부하여 임헌회가 죽을 때까지 아산·전의·연기·진천·상주·문천 등지로 따라가 살면서 학문을 연마하며 임헌회의 수제자가 되었다.
1882년(고종 19)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선공감감역·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강원도도사, 1894년(고종 31) 사헌부장령, 이듬해 순흥부사·중추원찬의(中樞院贊議)를 제수(除授)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전우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1895년(고종 32)에는 박영효(朴泳孝) 등이 수구(守舊) 학자의 우두머리로 전우를 지목하고 개화를 실현시키려면 전우를 죽여야 한다고 고종에게 여러 번 청하였으나 승낙을 얻지 못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우는 소(疏)를 올려 을사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전우는 제자들과 상의하여 “마침내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공자의 뜻을 취하고 해도로 들어갔다. 지금의 부안·군산 등지의 앞바다에 있는 왕등도(暀嶝島), 군산도(群山島) 등 작은 섬을 옮겨 다니면서 강학(講學)하여 나라는 망하더라도 도학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전우는 1912년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하여 섬 이름을 중화를 잇는다는 의미인 계화도(繼華島)라 부르면서 계화도에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이(李珥)의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을 계승하여 이(理)는 무위(無爲)임을 주장하고, 실제상의 작용은 모두 기(氣)가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이의 명덕지시본심(明德只是本心)을 이어받아 심즉기(心卽氣)·명덕시기설(明德是氣說)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이의 심위기주(心爲氣主)를 확대하여 심본성(心本性)·심학성(心學性)을 주장하고, 성존심비(性尊心卑)·성사심제(性師心弟) 등 새로운 성리학 용어를 많이 제창하였다.
특히 ‘미발기질체청설(未發氣質體淸說)’을 창안하였다. ‘미발기질체청설’은 스승 임헌회가 몸담은 낙론계의 학설을 한층 발전시킨 것이었다.
제자로 오진영(吳震泳), 최병심(崔秉心), 이병은(李炳殷), 송기면(宋基冕), 권순명(權純命), 유영선(柳永善), 김병준(金炳駿), 김택술(金澤述) 등을 비롯하여 3,000여 명이 있다.
저서로는 『안자편(顔子篇)』, 『연원정종(淵源正宗)』, 『간재집』, 『간재사고(艮齋私稿)』 등이 있다.
[묘소]
전우의 묘소는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기산리 산3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78년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방축리[현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에 남아 있는 덕성서원을 비롯하여 전라북도 부안 계화도의 계양사(繼陽祠), 경상남도 의령의 의산사(宜山祠), 전라북도 고창의 용암사(龍巖祠), 전라북도 정읍의 태산사(台山祠) 등에 제향(祭享)[제사를 지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