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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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陳時策 |
영어공식명칭 | Jin Sichaek |
이칭/별칭 | 위정,거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반곡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안경희 |
[정의]
조선 후기 세종 지역 출신의 학자.
[개설]
진시책(陳時策)[1831~1906]은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능통하고 역학(易學)에 특히 통달한 인물로, 개항기 고종에 의하여 ‘거사(居士)’라 호칭된 학자이다.
[가계]
진시책은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반곡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本貫)은 여양(驪陽), 호는 위정(葳汀)이다.
[활동 사항]
진시책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다. 경서와 사기에 능통하였고 역학에 특히 통달하여 시인들이 진시책을 동방의 ‘석학(碩學)’이라고 격찬을 하였다고 한다.
개항기 국운이 기울자 당시 보국판서를 지낸 서상우(徐相雨)가 고종에게 진시책을 역학에 밝고 시작(詩作)에 통달함이 공명과 같은 훌륭한 인재라 하며 추천하자 고종이 1901년(광무 5)에 진시책을 불러들였다.
고종은 이듬해에도 진시책을 불러들여 국사 자문(諮問)에 응하게 하였고, 국정에 크게 공헌하게 된다.
고종은 이러한 진시책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작위(爵位)를 내렸으나 진시책은 모두 거절하고 은거(隱居)[세상을 피해서 숨어 삶]하였다.
특히 진시책은 국난을 순탄하게 타개하지 못하였음을 통탄하며 작위를 사퇴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진시책의 정신에 고종은 진시책을 ‘거사(居士)’라 칭하고 가선대부의 품계를 내려주었으며, 진시책이 죽자 장례에 사용할 초와 돗자리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진시책의 행적은 『금고실기(今古實記)』에 실려 있다.
[학문과 저술]
필사본 문집으로 『위정집』과 『위정집』 중 중요한 시문을 뽑아서 엮은 『위정집약초』가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금남면 반곡리 입구 정면에 1921년에 세워진 진시책의 유허비가 남아 있다. 유허비는 정면에 ‘陳微士公遺墟碑(진미사공유허비)’라는 비문이 있고, 비석의 측면과 후면은 마모가 심하여 내용을 알아보기 어렵다.
유허비는 옥개형의 이수(螭首)[비석의 머리]를 갖추었고, 비의 전체 높이는 225㎝에 달하였으며, 방형의 대좌가 일부 땅속에 묻혀 있는 상태였다.
현재는 유허비가 세종특별자치시 건설로 후손들에 의하여 부여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