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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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養文 |
영어공식명칭 | Im Yangmu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용호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철원 |
출생 시기/일시 | 1744년(영조 20) - 임양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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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810년(순조 10) - 임양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04년(광무 8) - 임양문 정려 받음 |
묘소|단소 | 임양문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다솜리[용호3리] 출동산 서쪽 기슭 |
묘소|단소 | 효자 임양문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용호리 427-2 |
성격 | 효자 |
성별 | 남 |
본관 | 부안 |
[정의]
조선 후기 세종 지역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부안이다. 아버지는 임시무, 어머니 진주정씨[1709~1782]는 정세평의 딸이다.
[활동 사항]
임양문(林養文)[1744~1810]은 성격이 온량(溫良)[성품이 온화하고 무던함]하고 청명(淸明)[깨끗하고 선명함]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6~7세에 『효경』과 『소학』을 배워 어버이 섬김에 효성이 지극해서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는 것이 어른과 같았다. 어른이 되어 외출 후 집에 돌아왔을 때는 반드시 어버이에게 집에 돌아왔음을 알리는 법도를 지켰다. 아버지가 병이 들자 허리띠를 풀지 않고 잠시도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가늠하였다. 하루는 용한 의원이 부친의 병에 산삼이 효험이 있다고 말하자 한겨울에 산삼을 구해서 아버지에게 드려 차도를 보았다. 아버지가 숨을 거두자 애통해 하며 크게 슬퍼하였다. 어머니가 나이 70세가 넘어 노환으로 자리에 눕자 집안의 대소사를 한글로 써서 어머니에게 알려 드렸으며, 50세가 넘어서도 어린아이처럼 재롱을 부리며 어머니를 즐겁게 하였다. 부친상과 모친상 모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상장(喪杖)[상을 당한 사람이 상례나 제사 때 짚는 지팡이]을 끌고 다닌 자리가 길이 되었고, 무릎을 꿇은 자리가 움푹 파였으며, 묘소 곁의 소나무와 산초나무를 어루만지며 울부짖어서 나무들이 모두 말라 죽었다고 한다.
[묘소]
임양문의 묘는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다솜리 출동산 서쪽 기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04년 충청남도관찰사 이건하(李乾夏)[1835~1913]가 추천하여 1904년(광무 8)에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 등을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를 받았다. 효자 임양문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적 제5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