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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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基喆妻密陽孫氏·金聖欽妻昌寧成氏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내판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윤철원 |
추모 시기/일시 | 1904년 - 열녀 밀양손씨·창녕성씨 정려 내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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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시기/일시 | 1905년 - 열녀 밀양손씨·창녕성씨 정려 건립 |
묘소|단소 | 김기철 처 밀양손씨·김성흠 처 창녕성씨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내판리 상곡 |
사당|배향지 | 열녀 밀양손씨·창녕성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내판3리 |
성격 | 열녀 |
성별 | 여 |
본관 | 밀양|창녕 |
[정의]
개항기 세종 지역 출신의 양세 열부.
[개설]
밀양손씨와 창녕성씨는 안동김씨 집안으로 출가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이다. 밀양손씨는 혼례를 올린 지 4개월 만에 남편 김기철(金基喆)과 사별하였으나 유복자[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를 여읜 자식] 김성흠을 낳아 잘 양육하였다. 창녕성씨도 출가한 지 2년 만에 김성흠이 죽자 외아들 김광묵을 잘 길렀으므로 시어머니 밀양손씨와 더불어 양세열녀로 정려를 받았다.
[가계]
창녕성씨의 아버지는 성재현(成載鉉)이다.
[활동 사항]
밀양손씨는 안동 사람 김기철과 혼인하여 임신 4개월 만에 남편과 사별하였다. 이때 손씨는 17세였음에도 정성을 다해 삭망례(朔望禮)[초하루(삭)와 보름(망)날 대성전에 봉심례를 올리는 것]를 올리는 등 삼년상을 마쳤다. 그 후 유복자 김성흠(金聖欽)이 성장하여 맞은 며느리가 창녕성씨이다. 창녕성씨는 나이 18세에 시집와서 20세에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아들을 낳은 후 4개월 만에 남편 김성흠이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시어머니 밀양손씨와 며느리 창녕성씨는 말할 수 없는 비통함에도 유복자 김광묵의 교육에 온 정성을 쏟았다. 창녕성씨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좋아하던 잉어를 제사 때마다 올리는 정성으로 예를 갖추었으며, 이웃을 잘 도와서 주변의 칭송을 받았다. 밀양손씨와 창녕성씨의 갸륵한 정절과 함께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높자 지역 유림들이 조정에 알리게 되었다.
[묘소]
김기철 처 밀양손씨와 김성흠 처 창녕성씨의 묘소는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내판리 상곡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04년(고종 41)에 정려를 내려 이듬해인 1905년에 건립하였다. 홍문관 교리 조진만(趙鎭萬)이 글을 짓고 장태섭(張台燮)이 쓴 비문에 “난초가 골이 났으니 그 향기가 멀리도 가누나”라고 두 여인의 아름다운 정절을 찬양하였다. 열녀 밀양손씨·창녕성씨 정려는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내판3리에 있으며, 연기군 향토유적 제24호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24호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