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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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陳會顯妻金海金氏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반곡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윤철원 |
추모 시기/일시 | 1955년 - 진회현 처 김해김씨 열녀문과 비석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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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시기/일시 | 1987년 - 진회현 처 김해김씨 열녀문과 비석 중수 |
추모 시기/일시 | 2018년 - 진회현 처 김해김씨 열녀문과 비석을 나성동독락정역사공원으로 이건 |
사당|배향지 | 진회현 처 김해김씨 열녀문과 비석 -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 |
성격 | 열녀 |
성별 | 여 |
본관 | 김해 |
[정의]
일제강점기 세종 지역 출신의 열녀.
[개설]
진회현 처 김해김씨는 16세 어린 나이에 반곡리 진회현에게 출가한 후 18세에 남편과 사별하였다.
남편을 따라 자결(自決)[스스로 목숨을 끊음]하려 하였으나 유복자(遺腹子)[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를 여읜 자식]가 있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후 출산한 아들을 훌륭하게 기른 열녀이다.
[활동 사항]
김해김씨는 16세 되던 해인 1917년에 반곡리 여양진씨 집안의 진회현에게 출가하였다. 김해김씨는 가난한 형편에도 남편과 함께 시부모를 모시고 살림을 꾸려나갔다.
1919년 4월 남편 진회현이 부강장에 솥을 사러 가서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에 쫓겨 금강에서 익사하였다.
강물에 빠져 죽은 남편의 시신을 찾지 못하자 나무로 깎은 신주(神主)[죽은 사람의 위패]로 장례를 치렀다.
18세의 젊은 나이에 홀로 된 김해김씨는 살길이 막연하여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태중(胎中)에 유복자가 있는 것을 알고 포기하였다.
그 후 농토가 없는 가세에도 홀로 시부모를 모시면서 가장 역할을 감당하였으며, 시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는 더욱 가난해져 유복자를 데리고 가가호호(家家戶戶) 전전하며 날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김해김씨는 가난 속에서도 농토를 장만하고 외아들을 훌륭하게 길렀으며, 이러한 열행을 유림과 마을 주민들이 후대의 본보기로 삼고자 1955년 열녀문과 비석을 세웠다.
[상훈과 추모]
1955년 마을 주민들이 열녀문과 비석을 세웠다. 김해김씨 열녀문은 1987년 중수(重修)하였으며, 2018년 나성동독락정역사공원으로 이건(移建)[건축물 따위를 옮겨 짓거나 세움]하였다.
김해김씨 열녀문은 2001년 5월 31일 연기군 향토유적 제29호로 지정되었다가 세종특별자치시 출범에 따라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적 제29호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