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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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大洙 |
영어공식명칭 | Im Daesu |
이칭/별칭 | 임학수,임호경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을경 |
출생 시기/일시 | 1882년 2월 12일 - 임대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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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11년 - 임대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0년 - 임대수에게 건국포장이 추서됨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임대수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됨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9년 - 임대수의병장 공적비 건립 |
출생지 | 임대수 출생지 -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송담리[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
묘소 | 임대수의병장 공적비 -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정의]
개항기 세종 지역 출신의 항일 의병.
[개설]
임대수(林大洙)[1882~1911]는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송담리[현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일대] 출신으로 의병 전쟁에 참여하였다.
[가계]
출신 가문이나 성장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활동 사항]
임대수는 1907년 7월 광무황제 강제 퇴위와 8월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 전쟁이 격화·고조되자 의병에 투신한 것으로 보인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망국 조약인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로 체결하여 한민족의 격분을 샀다. 을사늑약 반대투쟁이 전국적으로 요원(燎原)[불타고 있는 벌판]의 불길처럼 번졌다. 전국 도처에서 의병이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1907년에 들어와 일제의 대한 침략은 절정에 이르렀다. 1907년 7월에는 정미7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마지막으로 장악한 뒤 특사 파견의 책임을 물어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8월에는 대한제국의 정규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켜 나라가 망할 때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군대의 저항을 미연에 차단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침략 책동, 특히 광무황제 강제 퇴위와 군대 강제 해산은 한민족의 대일 적개심과 항일기운을 더욱 고조시키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결과 전 민족이 대일전에 동참하게 되는 구국의 성전(聖戰)으로 승화되었다. 임대수도 의병 대열에 동참하여 충청남도 각지를 옮겨 다니며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한때 5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은진(恩津)의 헌병 분견소를 습격하여 총기·탄약 및 서류 등을 탈취하고 구금 중인 지사(志士)들을 구출하였다. 주로 공주·천안을 비롯하여 청양·당진·보령 등지를 무대로 삼아 1910년 경술국치 이후까지 수년 동안 끈질기게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1911년 6월, 공주에서 일제 군경과 교전하던 중 동료 의병 6명과 함께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임대수의 공적을 기리어 1980년에는 건국포장(建國褒章)[상훈법 20조로 규정된 건국훈장 다음 가는 훈격]을 추서하였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追敍)[죽은 뒤에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 따위를 줌]하였다.
1999년에는 임대수 의병장을 추모하기 위하여 임대수의병장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임대수의병장 공적비는 나성동독락정역사공원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