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1421 |
---|---|
한자 | 金承露 |
영어공식명칭 | Gim Seungro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성배순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11년 - 『전동면지』 수록 |
---|---|
관련 지명 | 국사봉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석곡리 |
성격 | 인물설화|지명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김승로|고종|신하들 |
모티프 유형 | 인물유래담|지명유래담|충신|억울한 죽음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에서 충신 김승로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김승로」는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의 지명전설이자 충신 김승로와 관련한 인물설화이다.
고려 후기 몽골군이 쳐들어왔을 때 활약한 충신 이야기와 전동면 지역 자연지명인 대좌고개·국사봉·벼르재고개·칼거리·미호평야·붉은덕·개미고개가 등장하는 지명유래담이 함께 나타나는 설화이다.
[채록/수집 상황]
2011년 전동향토지발간 추진위원회에서 발간한 『전동면지』에 수록되어 있다. 구술자는 정확하지 않으나 지역의 역사적인 인물을 다루므로 전의 지역에서 전승되어 오는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내용]
1236년(고종 23) 몽골군이 침략하였을 때 고종은 현재의 세종 방면으로 피란하였다. 그러나 전의 북쪽에서 공주 방향과 조치원 방향 중 어느 쪽으로 갈 것인지 선택하지 못하고 고심하고 있었다.
이때 한 장수가 나서서 말하기를 “조치원 쪽으로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조치원 쪽은 눈으로 볼 때는 비록 산이 험하여 보여도 삼십 리를 걸어 가면 평야가 나옵니다. 이곳은 넓은 평야 지대니 수확한 곡식이 많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곡식을 모아 병사를 먹이고 훈련하면 몽골군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고종은 신하의 말을 믿고 조치원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한참을 가도 조치원은 나오지 않고 첩첩산중이 계속되었다. 이에 군신들은 회의를 하였고, 회의한 장소를 ‘대좌(大座)고개’라 이름하였다.
회의 결과 국사봉에 병사를 보내 주변을 관찰하게 지시하였다. 하지만 병사가 국사봉에 올라갔을 때 주변에 안개가 끼어서 살펴볼 수 없었다.
결국 고종 일행은 조치원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행진하였고, 조치원 쪽으로 남진을 주장한 신하는 왕을 속인 죄로 목에 칼을 차게 되었다.
그 후 신하가 칼을 찬 고개를 ‘벼르재고개’라 하고, 칼을 씌운 장소를 ‘칼거리’라 하였다. ‘벼르재’란 말은 신하를 죽이려고 벼르고 벼른 고개란 뜻이다.
고종 일행은 남쪽으로 한참을 내려가다가 신하를 처형하였다. 신하가 죽기 전에 말하기를 “이제 오리만 가게 되면 평야가 나올 것입니다. 그대들은 나를 죽인 후 충신을 죽였다고 후회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일행이 오리쯤 남진하니 죽은 신하의 말대로 ‘미호평야’가 나타났다. 고종과 대신들은 신하를 죽인 것을 후회하였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충신이 참형 당하면서 흘린 붉은 피가 물든 언덕을 그때부터 ‘붉은덕’이라 하였다.
고종과 대신들은 미호평야에서 식량을 구하고 병사를 불러 모아 몽골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리고 수도로 올라가는 길에 ‘개미고개’ 근처에서 충신의 장례를 치러 주었다.
억울하게 죽은 충신의 이름은 강릉김씨 김승로 장군으로 전해진다.
[모티프 분석]
「김승로」 설화의 주요 모티프는 ‘억울한 죽음’이다. 역사적 인물인 강릉김씨 김승로 장군의 이야기는 전동면 청람리 마을 국사봉 아래에 묻힌 김승로의 죽음과 관련하여 전해져 내려온다.
지역의 구체적인 지명이 들어간 지명유래설이기도 하다. 김승로 장군의 억울한 죽음이 이야기의 기본 축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