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14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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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王朝實錄-記錄-王-全義椒水 |
이칭/별칭 | 왕의 물 |
분야 | 지리/자연 지리,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관정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상호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33년(세종 15) - 세종, 풍증 치료차 한 달간 온천 요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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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41년(세종 23) - 세종, 온양에서 한 달간 요양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42년(세종 24) - 세종, 강원도 이천 온천에서 한 달간 요양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43년(세종 25) - 세종, 온양 온천에서 한 달간 요양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44년(세종 26) - 전의초수 발견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44년(세종 26) - 세종, 청주초수로 치료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함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44년(세종 26) - 전의초수 상송사목 설치 |
[전의초수의 개설]
전의초수(全義椒水)는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관정리 상대부 마을, 차령산맥의 흑성산 줄기인 월조산 아래에 자리한다.
세종은 충청도 온양과 강원도 이천(伊川)의 온천에서 풍증(風症)과 눈병 치료를 위하여 봄철마다 여러 차례 온천 요양을 하였다.[세종 15년(1433) 봄 풍증 치료차 한 달 동안 온천 요양, 세종 23년(1441) 봄 어두운 곳은 지팡이를 짚고 다닐 정도에 이르자 온양에서 한 달 동안 요양, 세종 24년(1442) 봄 강원도 이천 온천에서 한 달 동안 요양, 세종 25년(1443) 봄 온양온천에서 한 달 동안 요양]
그러나 눈병에는 더운물이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여 온천 치료를 중단한 상태에서 초수(椒水)[천연 탄산수]를 발견하여 새로운 치료 가능성을 시험하게 되었다. 이에 전의와 청주의 초수에 내섬시윤(內贍侍尹) 김흔지(金俒之)를 보내 확인하고 행궁(行宮)을 건설하도록 계획하였다.
세종은 두 달 동안[세종 26년 2월 28일~5월 7일] 청주[초정]의 약수로 눈병을 치료하고 온양의 온천수보다는 효험을 보았지만 큰 차도는 없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세종은 실제로 청주초수로의 행차를 거절한다. 대신 경기도 일대에서 초수를 찾아보려 하였으나 쉽지 않아 전에 파악하여 알고 있던 전의초수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세종은 병조판서 정연을 불러 “전의에 있는 약수터에는 가을에 행궁을 지은 다음 후년에 갈 곳으로 정하고 올가을에는 청주의 초정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며 전의초수를 청주초수의 대안으로 적극 채택하여 같은 해 가을 전의에 행궁을 짓고, 이듬해에는 전의에서 요양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백성들의 고초가 흉년으로 심한 때이기에 행행(行幸)[임금이 대궐 밖으로 거둥함]할 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전의는 궁궐에서 250리나 떨어져 있어 일상적인 노정(路程)으로 4~5일이 소요되는 먼 거리였다. 이에 세종은 7월 초 내섬시윤 김흔지를 시켜 전의초수를 궁궐에 올려보내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전의에 행궁을 건설하는 것까지 고려하였지만 가뭄으로 인하여 가을에 청주초수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병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 치료를 위한 임시 조처를 하였다. 임상시험 결과 약효가 뛰어난 전의초수를 조달하기 위하여 마련된 방법이 바로 세종 26년[1444] 7월의 전의초수 상송사목(全義椒水 上送事目)이다.
[처음 기록에 보이는 전의초수(全義椒水)]
전의초수는 『세종실록』에 처음 기록이 나타나는데 세종 때 국가에서 초수를 조사하고 왕에게 바쳤다. 세종 26년[1444] 1월 27일의 기사(記事)[사실을 적은 글]를 보면 어떤 사람이 와서 아뢰기를 “청주(淸州)에 물맛이 호초(胡椒)[후추] 맛과 같다고 하여 이름을 초수(椒水)라고 하는 물이 있는데, 여러 가지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또한, 목천현(木川縣)과 전의현(全義縣)에도 이러한 물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세종이 이를 듣고 눈병을 치료하려는 생각으로 내섬시윤 김흔지를 초정으로 내려보냈다. 그리고 물을 찾아내어 아뢴 사람에게는 목면(木棉) 10필을 주었다. 기록에서는 청주와 목천·전의가 함께 거론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전의초수에 대한 조처가 내려진 것은 아니다. 소문으로 목천과 전의에도 청주의 초정과 같은 초수가 있다는 정도의 보고이다.
『세종실록』 세종 26년[1444] 4월 4일 “임금이 전(前) 만호(萬戶) 유면(柳丏)과 전(前) 현감 정중건(鄭仲虔) 등을 전의현 약수터로 보내어 병을 치료하면서 초수의 효능을 임상시험 하게 하였다.”라는 기사에서 구체적인 기록이 나타난다. 세종 26년 4월 14일 병조에서 건의하기를 “전의(全義)에는 초정이 4곳이고 목천(木川)에는 초정이 2곳이 있습니다. 모두 영을 내려 지역에 경계를 표시한 구역을 모두 정리하여 경계 밖의 모든 논에만 농사를 짓도록 할 것입니다.”하니 왕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세종 임금의 전의초수에 대한 관심과 보호]
세종 19년부터 당뇨까지 겹쳐 세종의 눈병은 더욱 심하여졌다. 온양과 이천의 온천에서 눈병 치료를 위하여 여러 차례 온천 요양을 하다 치료를 중단한 상태였다. 이때 초수 발견으로 새로운 치료의 가능성을 시험하게 되고, 아울러 눈병을 앓고 있는 전직 관원 등 몇 사람을 청주초수와 전의초수로 보내어 치료 효과를 시험하게 하였다. 병이 조금 나았다는 경과 보고를 받자 세종은 청주초수로 행차하게 되었다. 청주 행차에서도 경비를 절약하고 민폐를 방지하기 위하여 세심하게 배려하였다.
세종은 세종 26년[1444] 2월 28일 왕비와 세자 및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출궁하여 양지·죽산·진천을 거쳐 3월 2일 초수리[현 초정약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초정리 일대]에 도착하였다. 두 달간 요양한 뒤 어느 정도 효과를 보고 5월 3일 초수리를 출발하여 5월 7일[5일간] 환궁하였다. 세종은 전의초수 4곳에 경계를 표시하여 초정 안에 잡다한 물이 스며들지 않게 하였다.
세종 26년 6월 1일 김흔지가 전의에서 돌아와 “약수의 수원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행궁을 지을 목재가 충분하옵니다.”라고 하였다. 이후로 세종은 전의초수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였다. 약수가 있는 마을과 도중의 숙소·점심참에서 가까운 마을에 있는 전염병 환자들을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주시키고 엄하게 단속하되 이로 인하여 사망자가 없도록 특히 유념할 것 등을 경기·충청도 관찰사에게 지시하였다.
8월에는 눈병을 앓는 사람인 이내은동(李內隱同)·김을생(金乙生) 등을 전의초수로 보내어 치료하도록 하고 전의현감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옷을 내리도록 지시한다. 그런데 이때 세종이 구체적으로 전의초수를 어떻게 이용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또한 세종이 경기도 일대에서 초수를 찾으려 한 흔적도 있다. 2개월의 치료를 마치고 환궁한 이후 세종은 아침마다 전의초수에서 바쳐진 초수로 세수를 하고 물을 마셨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해를 넘긴 세종 27년[1445]에도 계속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충청도관찰사 김조(金銚)와 도사 박건순(朴健順)이 궁궐로 찾아가 물이라는 것은 근원을 떠나면 근성(根性)[태어날 때부터 지닌 성질]을 잃으므로 약효가 떨어지니 행행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계속 전의초수를 궁궐로 보내라”하여 치료를 계속하였다.
[전의초수 상송사목(全義椒水 上送事目)]
세종 26년 7월 4일 충청도관찰사 김조와 경기도의 정역찰방(程驛察訪) 이백견(李伯堅)에게 “내섬시윤 김흔지의 말을 듣는 한편 지니고 가는 사목(事目)을 보고 약수 수송에 협조하여 조치를 취하라.”라며 내린 지시와 다음에 적는 사목 내용은 전의초수가 ‘왕의 물’로 불리게 되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세종실록』 26년 7월 4일의 전의초수 상송사목을 보면 조선시대의 초특급 수송 작전을 방불케 하는 핫라인이다. 시간을 지체하면 전의초수의 효험을 얻을 수 없기에 잘 밀봉하고 먼 거리를 단숨에 달리어 효과가 온전히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조처였다. 해질녘에 출발하여 동틀 무렵까지 7~8시간 안에 전의에서 궁궐에 도착하여야 하였다. 잘 달리는 말과 건장한 사람이 필요하였으며, 상송사목은 제반 준비와 조처를 제시하고 있다.
〈전의초수 상송사목(全義椒水 上送事目) 내용〉
1. 전의(全義)의 초수(椒水)는 각 역참에서 걸음이 빠른 말 2마리를 골라서 오로지 약수만을 수송하게 하고 다른 목적으로는 부리지 못한다.
2. 약수는 성실하고 사리에 밝은 사람 2명을 선발하여 감고(監考)로 정하고 건장한 사람 3명을 선발하여 압직(押直)의 직책을 주어 매일 감고 1명, 압직 1명이 윤번(輪番)[번을 돌아가며 차례로 드는 것]으로 지키도록 한다. 관청에서는 이들에게 아침과 저녁 식사를 제공하여야 한다.
3. 큰길의 각 역참에서는 약수를 지키고 수송하는 사람 3명을 선발한다.
4. 전항의 약수를 수송할 때 각 역참(驛站)에서는 말 2마리와 압직(押直) 3명으로 구성된 인원이 서로 돌아가면서 압직도 서고 휴식도 취하게 하며, 한 번 끝나면 이를 다시 전처럼 반복하게 한다.
5. 전의의 약수는 입직(入直)을 서는 감고(監考)가 매일 해질 무렵 옹기에 약수를 담아서 약 기운이 빠지지 않도록 봉한 다음 서명(書名)을 한다. 그 시간까지 적어서 역마에 실어 압직에게 인계하고 압직은 다음 역참의 압직에게 인수인계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신속하게 전달하여 하룻밤 안에 서울로 수송하여 바치게 할 것. 그러나 만약 이 일을 지체시키는 경우에는 찰방(察訪)과 역승(驛丞)이 즉시 처벌을 받을 것이다.
6. 초수 수송을 잘하였는가 못하였는가에 대하여서는 찰방과 역승 등이 함부로 단속하지 못하게 한다.
7. 이번에 보내는 사복시(司僕寺) 말 8마리는 각 역참의 가난한 역졸들에게 분사(分賜)하여 주고 약수를 수송하는 데 사용하도록 한다.
[지역문화 활용 측면의 과제]
기록 중심으로 전의초수에 대한 사실을 간략히 정리하면서 전통 온천수인 ‘전의초수(全義椒水)’와 관련된 기록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보았다. 지역의 문화, 향토사 연구에서 관련 자료는 가장 중요하지만 자료 부족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자료 부족으로 문화 자원을 왜곡할 수도 있고 문화 자원 활용에 큰 문제가 되기도 한다.
전의초수를 문화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서는 천편일률(千篇一律)적인 행사에서 벗어나 문화 특성이 살아있는 전의만의 특별한 축제가 되어야 한다. 콘텐츠 조사와 다양한 소프트웨어 개발에 힘써야 할 것이다. 따라서 네 가지 향후 과제로 정보 핫라인 활용 콘텐츠화, 전의초수의 위치와 유적 찾기 및 관련 인물의 유서 연구, 전설과 지명 일화 수집, 세종 임금의 애민 정신 부각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로 상송사목이 의미하는 정보 핫라인 활용을 콘텐츠화하여 당시의 전의현감 행적과 세종 임금의 아침 탁자에 모인 충청 지역 활동 보고서를 살펴야 한다. 더 나아가 당시 ‘왕의 물’의 정보 핫라인 구축과 연계된 이야기를 새롭게 찾아야 한다. 또한 전의초수 역사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내섬시윤 김흔지]의 역할에 대한 추적이 필요하다.
둘째는 전의초수의 위치와 유적 찾기 및 관련 인물의 유서 연구이다. 세종 26년(1444) 4월 14일 자 병조 보고에 의하면 전의에 초정이 4곳 있다고 하였다. 4곳 중 1곳이 전의초수라면 나머지 3곳은 어디인지 전설과 지명, 일화를 총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구전과 전설을 수집하고 정리·분석하여 당시 시대의 사정과 전의초수의 특수한 모습을 살펴 재조명해야 한다. 전의초수가 발견되고 국가로부터 보호시설과 조치가 취하여진 흔적 확인으로 전의 초정 4곳에는 경계를 표시하고 그 안에 잡된 물이 스며들지 않게 한 유구와 흔적들을 찾는 노력, 1444년에 임상 치료차 전의에 보내진 이내은동(李內隱同), 김을생(金乙生) 이야기, 장택과 승 신정(信玎), 전의초수를 지키는 직임을 맡았다가 복호(復戶)의 상을 받는 진선(陳善)과 송윤(宋尹) 등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셋째는 전설과 지명, 일화를 수집 정리하는 것이다. 일화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야 하며[중과 처녀가 빠져서-중샘], 그에 상응하는 역사의 흔적과 일화도 분명 확인이 가능하여야 한다.
넷째는 세종의 애민 정신을 부각시키는 데 있어 기록을 검토하는 것이다. 세종이 충청지역에 머무는 동안 지역민을 각별히 배려한 것이 주목된다. 『세종실록』 26년 3월 1일 청주의 80세 이상 노인 26명과 80세 이상 노인 30명에게 벼와 콩 각 1섬을 하사함, 『세종실록』 26년 3월 29일 초수 마을의 감고(監考) 등 8명에게 무명을 하사함, 『세종실록』 26년 3월 24일 초정 부근의 농민 38호와 백성 280여 명에게 술과 고기를 하사함, 『세종실록』26년 4월 24일 씨앗용 종자 7만 석과 양식 20만 석을 추가 지급함, 『세종실록』 26년 5월 1일 초수 부근 폐농(廢農)[농사를 그만둠]된 논 1부에 쌀 5말 및 밭 1부에 콩 5말을 나누어 주도록 함 등이다. 또한 전의초수 상송사목에서 사복시 말 8마리는 각 역참의 가난한 역졸들에게 나눠 주고 약수를 수송하는 데 사용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