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109
한자 赤松里
영어공식명칭 Jeoksong-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적송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규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3월연표보기 - 경상북도 성주군 청파면 적송동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34년연표보기 - 경상북도 성주군 청파면 적송동에서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적송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88년 5월연표보기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적송동에서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적송리로 개편
성격 법정동
면적 2.30㎢
가구수 93가구
인구[남/여] 164명[남 68명/여 96명]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적송1리의 자연 마을로 적송리(赤松里)와 새주막[新酒幕]이 있고, 적송2리의 자연 마을로 학동(鶴洞)과 오인동(五印洞)이 있다. 고려 시대에 장대왕이라는 사람이 해인사의 주락전을 건립한 뒤 동쪽으로 가다가 지금의 적송리에서 하룻밤 머물렀는데, 적송이 많은 것을 보고 마을 이름을 ‘적송’이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 중국 전설 시대 선인(仙人)인 적송자(赤松者)와 같은 인물이 많이 사는 곳이라고 적송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학동은 조선 태종(太宗) 때 만들어진 마을로, 봄이면 뒷산 숲속에 학들이 모여 살아 학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오인동은 고려 후기 문충공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1347~1392]의 아들들이 살았던 마을로, 이들은 뒷산 오인암에서 놀았고 오인재(五印齋)도 건립하였는데, 오인암과 오인재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오인동으로 하였다고 전한다. 현재 오인암은 마을 동제 터이다.

[형성 및 변천]

조선 후기까지 청파방에 속하였다. 1895년(고종 32) 5월 관제 개혁 때 현재의 군 명칭인 성주군(星州郡)으로 확정하고 방(坊)을 면(面)으로 개편하였다. 1914년 3월 행정 구역 개편 때 적송동으로 하고 청파면의 법정동으로 편제하였다. 1934년 청파면과 지사면을 수륜면으로 합면하였다. 1988년 5월 조례 제1076호에 따라 동(洞)을 리(里)로 개정하여 수륜면 적송리가 되었다.

[자연환경]

수륜면의 소재지인 신파리를 거쳐 적송리 분통골[粉筒谷]신정리 양정 마을로 나드는 국도 제33호선의 고개를 느릅재 혹은 늘붓 고개[유현(楡峴)]라고 부른다. 이 고개가 노인봉의 한 지맥으로 남으로 내려와 박달산(朴達山)이 되었는데, 적송리는 이 박달산 아래에 있다. 가야산에서 발원하여 적송리 저수지를 거쳐 신파리 부근에서 신당천(新塘川)으로 들어가는 소하천을 범천골이라고 한다. 오인동천(五印洞川)은 가야산에서 발원하여 오인동 마을을 거쳐 새주막에서 신당천으로 들어가는 소하천이다. 오인동 마을 앞들을 먹들이라고 부르는데, 먹들 사이로 신당천과 오인동천이 흐른다.

[현황]

적송리수륜면의 남쪽에 자리하여 동서남북이 수륜면수륜리성리, 신파리, 봉양리, 신정리와 접한다. 2021년 12월 31일 기준 면적은 2.30㎢이며, 적송1리와 적송2리 2개 행정리에 93가구, 164명[남 68명, 여 9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적송리의 인구는 1974년 568명에서 1994년 235명, 2001년 178명, 2018년 154명으로 감소하였다가 2021년 164명으로 다소 증가하였다. 가구 수는 1970년대 중반부터 계속 감소하고 있다.

국도 제33호선이 동쪽에서 남북으로 지나간다. 문화 유적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병조판서에 증직된 제말(諸沫)[1543~1592]과 제말의 조카 제홍록(諸弘祿)[1558~1597]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1947년에 건립한 재실인 쌍충재(雙忠齋)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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