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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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星明學校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개교 시기/일시 | 1910년 10월 - 성명학교 개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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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설립지 | 성명학교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
성격 | 근대 사립 학교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에 있었던 사립 교육 기관.
[교육 목표(교훈 포함)]
교육 목표는 ‘신교육을 통한 신진 인재 양성’이었다.
[설립 배경]
1907년(고종 44) 초 대구 지역에서 처음 시작된 국채 보상 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나, 전국적인 모금액으로도 국채[1300만 원]를 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결국 1910년(순종 3) 4월 단연동맹회(斷煙同盟會)에서 모금한 성금을 처리하기 위해 서울에서 국채보상금처리회 전국대표자회의가 개최되었다. 여기에 성주군 대표로는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참여하였다. 전국에서 300여 명이 참여한 국채보상금처리회 전국대표자회의에서는 국채 보상금 처리를 놓고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특히 일진회 대표 김상범(金相範)이 기금을 중앙에서 모아 각 정당의 감독 아래 처리하자고 제안하자, 심산 김창숙은 일진회의 주장을 격렬하게 반대하고 국채보상금처리회 탈퇴 선언과 함께, 성주 지역의 국채 보상금으로는 “사립 학교를 설립할 것”이라 선언하였다. 심산 김창숙은 고향으로 돌아와 김원희(金元熙)·도갑모(都甲模)·이항주(李恒柱)·이진석(李晉錫)·배동옥(裵東玉) 등과 함께 국채 보상금 처리 문제를 의논하였다. 이 자리에서 전원 찬성하여 국채 보상금으로 사립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기로 하였다.
[변천]
1910년 9월 초순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로 개교하였다. 성주군에서 모금한 국채 보상금은 약 10만 원 정도였는데, 그 이자로 학교 경상비로 충당하기로 하였다. 또 학교 건물을 새로 지으려면 비용이 많이 들어 서원 건물을 학교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당시 성주군에는 청천서원(晴川書院)과 회연서원(檜淵書院)이 있었다. 청천서원은 1729년(영조 5)에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을 봉향하기 위해, 회연서원은 1622년(광해군 14)에 정구(鄭逑)와 이윤우(李潤雨)를 봉향하기 위해 설립한 서원으로,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뒤 청천서원은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532번지 심산 김창숙의 아버지 김호림(金頀林)의 종택 사랑채를 중건하여 명맥을 유지하였고, 수륜면의 회연서원도 건물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학교로서는 청천서원보다 회연서원이 규모가 더 크고 좋은 조건이었지만, 서원 측의 동의를 얻지 못하자 청천서원을 개조하여 교실로 사용하였다. 서당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1.5칸의 팔작지붕이었다.
사립 성명학교 간판을 달고 개교하였는데, ‘성주를 개명시키는 학교’ 혹은 ‘성주의 개명 학교’라는 뜻이었다. 청천서원이 신교육을 하는 성명학교로 바뀌자 보수 유생들은 한결같이 “김창숙이 나와서 청천서원이 망한다”고 공격하였다. 이에 김창숙은 “유림의 뜻만 순종하느라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학생들을 거절하기보다는 신진 영재를 양성해서 새 시대에 통하는 선비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현재 청천서원 대청의 중간 기둥에 ‘성명학교’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성명학교의 설립은, 일제의 침략과 한국 강점에 저항한 성주 지역 사람들의 항일 민족의식을 북돋우면서 한 시대를 이끌어 갈 새로운 인재들을 양성하려는 구국 교육 운동이었다. 유교 교육의 요람이었던 청천서원이 신교육의 산실로 되었다는 점과, 학교 운영이 국채 보상 모금액으로 운영되었다는 점 등이 눈길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