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3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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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京山里斥和碑 |
영어공식명칭 | Anti-foreign Stele in Gyeongsan-ri , Seongju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성주여중고길 19[경산리 520]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은정 |
건립 시기/일시 | 1871년 - 경산리 척화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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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성주여자중·고등학교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성주여중고길 19[경산리 520] |
원소재지 | 성주 종로거리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
성격 | 척화비 |
양식 | 입비 |
관련 인물 | 흥선 대원군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04㎝[높이]|48㎝[너비] |
[정의]
1871년 외세를 배척하고 수교를 거부하는 의지를 나타내고자 흥선 대원군이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에 세운 비.
[개설]
경산리 척화비(京山里斥和碑)는 1871년(고종 8) 4월 신미양요를 겪은 후,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이 서울 종로를 비롯 전국 주요 도로변에 약 200여 개 건립한 비석 중 하나로, 비의 앞면에는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입을 경계하는 내용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건립 경위]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던 19세기 조선 시대는 폐쇄적인 외교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일찍이 산업 혁명을 바탕으로 성장한 구미 국가들은 세계 시장을 개척하고자 각 국의 개항을 요구하였다. 쇄국 정책을 고수하던 흥선 대원군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후 서양 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높이고자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는데 경산리 척화비도 그 중 하나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흥선 대원군이 납치되자, 일본 공사의 요구로 대부분 철거되어 전국에 몇 기만 남아 있다.
[위치]
경산리 척화비는 성주 종로거리에서 발견된 후 현재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성주여자고등학교 교정 내에 옮겨 설치되었다.
[형태]
경산리 척화비는 시멘트로 만든 2단의 기단 위에 화강암재의 비신이 결합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위가 둥근 장방형이고 높이 104㎝, 너비 48㎝로 비교적 작은 편이다. 비의 중앙은 파손된 후 접합된 상태이고 하단의 시멘트 기단에 의해 일부 가려져 있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양이침범비전즉화주화매국(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했을 때,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이라고 큰 글자로 새겨져 있고, 왼편에 ‘계아만년자손병인작신미립(戒吾萬年子孫丙寅作辛未立)[내가 이를 자손만대에 경계토록하기 위해 병인년에 글을 짓고 신미년에 비를 세우노라]’이라고 작은 글자로 새겨져 있다.
[의의와 평가]
경산리 척화비는 19세기 서양 열강의 문호 개방 요구에 맞서 자주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고자 노력한 당대의 역사 자료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