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403
한자 裵楔神道碑
영어공식명칭 Memorial Stone of Bae Seol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194-4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은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54년연표보기 - 배설 신도비 건립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51년 - 배설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599년 - 배설 사망
현 소재지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194-4 지도보기
성격 신도비
양식 입비
관련 인물 배설|정종호|이상건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182㎝[높이]|75㎝[너비]|22㎝두께]
소유자 성주·성산 배씨 종친회
관리자 성주·성산 배씨 종친회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에 있는 임진왜란 당시 무관 배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54년에 세운 비.

[개설]

임진왜란 당시 무장인 배설(裵楔)[1551~1599]의 자는 중한(仲閑), 호는 서강(西岡),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아버지는 영덕군수, 고부군수를 역임하고 의병장으로 활약한 배덕문(裵德文)이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야성송씨(冶城宋氏)로 장인은 좌의정 송렴(宋濂)의 6대손인 충순위(忠順衛) 송원(宋源)이다. 1583년(선조 16) 별시 무과에 합격하여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전생서: 궁중의 제향, 빈례 등 의식에 필요한 가축을 기르는 일을 맡았던 관서]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군관으로, 향병을 규합하고 왜적에 대항하여 공을 세웠다. 합천군수, 부산첨사, 진주목사, 선산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선산부사 재임시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쌓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경상우수사가 되어 웅천 전투에 참여하였다. 칠천량 해전 때 함대의 퇴각과 한산도에서 군사 시설 및 양곡, 군용 자재를 불태우고 백성들을 피신시켰으나, 칠천량 패전의 책임과 반역 모의라는 죄목으로 1599년 3월 처형당했다. 그러나 후일 그의 공적이 인정되어 1610년(광해군 2)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었다. 1873년(고종 10)에는 유림의 소청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겸 지의금부(知義禁府) 훈련원사(訓練院事)로 추가로 증직되었다.

[건립 경위]

배설 신도비(裵楔神道碑)는 그의 후손들이 임진왜란 당시 무장으로서 배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54년에 건립하였다.

[위치]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194-4번지, 도남리 뒷개 마을에서 금수면으로 넘어가는 국도 제30호선 변에 위치한다.

[형태]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이수와 귀부, 비신이 결합된 전형적인 신도비의 형태이다. 신도비의 전체 높이는 325㎝이고 비석의 크기는 높이 182㎝, 너비 75㎝, 두께 22㎝이다.

[금석문]

후학인 정종호(鄭宗鎬)가 글을 짓고, 이상건(李相虔)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는 배설의 가계와 임진왜란 당시 군의 기강을 증진시킨 활동 등 무장으로서 그의 공적이 기록되어 있다. 칠천량(漆川梁) 해전(海戰) 당시 훗날을 도모하여 퇴각하였으나 이후 정인홍(鄭仁弘)의 모함으로 참수된 배설의 억울한 죽음과 훗날 그의 공적이 인정되어 추증되는 내용이 남아 있다.

[현황]

국도 제30호선 변에 위치한 배설 신도비는 아버지인 배덕문의 신도비와 함께 병조참의 고암 배건(裵楗), 등암 배상룡(裵尙龍), 좌승지 괴재 배상호(裵尙虎)의 유허비와 병조 판서 명암 배즙(裵楫), 교남 배기훈(裵基薰)의 송덕비가 나란히 건립되어 있다. 성주성산 배씨 선조들의 업적을 기리어 현재 숭조대(崇祖臺)라 이르고 종친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무관인 배설의 가계와 공적이 기록되어 있는 신도비로 지역 향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임진왜란 사에서 칠천량 해전 당시 경상우수사였던 배설의 퇴각에 대한 그의 행적이 재평가되고 있어 향후 관련 연구 시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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