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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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德弼 |
영어공식명칭 | Han Deokpil |
이칭/별칭 | 상지(相之),춘귀당(春歸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명환 |
[정의]
조선 후기 성산현감을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상지(相之), 호는 춘귀당(春歸堂). 증조할아버지는 해천(蟹川) 한진(韓縝)[1607~1659]이고, 할아버지는 시와(是窩) 한태동(韓泰東)[1646~1687]이다. 아버지는 월악(月嶽) 한지(韓祉)[1675~?]이며, 어머니는 서재(徐梓)의 딸이다. 부인은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기오헌(寄傲軒) 권업(權𢢜)[1669~1738]의 딸이다.
[활동 사항]
한덕필(韓德弼)[1696~1771]은 1716년(숙종 42)에 음직(蔭職)으로 장릉 참봉(長陵參奉)·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에 부임하였으며, 이후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예안현감(禮安縣監)·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 등을 두루 거친 뒤, 1737년(영조 13)에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1674~1740]의 천거로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제수되었다. 당시 지평(持平) 이창의(李昌誼)[1704~1772] 등이 외직에서 장악원 정으로 옮기는 것은 부당하다며 고쳐서 바로잡기를 요청하였는데, 영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다가 전계(傳啓)가 이어지자 마침내 명을 거두었다.
1738년(영조 14)에 성산현감으로 부임하여서는 가뭄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구제하고 자비로 병장기를 수리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이어서 1748년(영조 24)에는 의주부윤(義州府尹), 1757년(영조 33)에는 경기수사(京畿水使), 1769년(영조 45)에는 홍주목사(洪州牧使)가 되었으며, 1771년(영조 47)에 부총관(副摠管)으로 있던 중 공주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용성길 25에 있다.
[상훈과 추모]
선정을 펼치던 한덕필이 1739년(영조 15)에 임기를 마치고 성주를 떠날 때, 고을의 백성들은 부모를 이별하듯 눈물로 그를 전송하였고, 이에 성주 고을 내 40개 면에 그의 덕을 칭송하는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후 1744년(영조 20)에는 영조가 호서염찰사(湖西廉察使) 윤광소(尹光紹)[1708~1786]에게 도내(道內)의 수령들 가운데 고을을 다스린 공적이 가장 훌륭한 자를 물어보았는데, 윤광소는 당시 충원현감(忠原縣監)으로 있던 한덕필을 들어 대답하으며, 이로 인해 한덕필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자(陞資)되었다. 또한 1747년(영조 23)에 좌의정(左議政) 조현명(趙顯命)[1690~1752]이 청렴한 사람들에게 높은 관직과 시호를 내리도록 청하였을 때에도 정형복(鄭亨復)[1686~1769]과 함께 특별히 벼슬의 품계가 오르게 되었다. 사후인 1796년(정조 20)에 청백리(淸白吏)로 선정되었으며, 1805년(순조 5)에 청백안(淸白案)에 재록(載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