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8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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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始永 |
영어음역 | Yun Siy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홍양일기(洪陽日記)』의 저자.
[가계]
본관은 파평. 아버지는 윤선필(尹善必)이다.
[활동 사항]
윤시영(尹始永)[1855~?]은 1891년(고종 28) 문과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 홍문관교리, 홍문관부수찬, 중학교수, 양호선무사종사관, 부안현감, 홍문관시독, 비서원승을 지냈다. 1902년(고종 39) 함흥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안핵사(按覈使)로 파견되어 그곳 수령의 잘잘못을 조사하였다. 1906년(고종 43)에 의병들이 홍주성(洪州城)[현 홍성]을 점거하자 일본 군대가 대포와 총으로 진압하여 인명 피해가 컸다. 윤시영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홍주군수에 급파되어 약 2개월 동안 재직하였다. 이후 홍주와 남포 등지에서 소요 사태가 일어나자 임금의 뜻을 백성에게 알리는 선유사(宣諭使)로 파견되었다.
윤시영은 평소 성품이 강직하고 의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례로 일본군이 홍주성에서 의병과 싸워 취득한 사환미(社還米) 49섬을 윤시영이 군수로서 돌려받게 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군은 인수증을 작성하면서 일본의 연호인 ‘명치(明治)’를 사용할 것을 강요한 것이다. 이에 윤시영은 ‘우리 쌀을 내가 찾아 굶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주려고 하는데 무슨 인수증이 필요하며, 더욱이 어찌 명치를 쓰겠는가?’라고 강경하게 대응 하였다고 한다. 이후 봉상사부제조(奉常司副提調)에 올랐으나 곧 물러났다.
[학문과 저술]
윤시영이 홍주군수로 재직했던 1906년 4월부터 2개월 간 홍주군의 행정일을 보면서 겪은 일들을 기록한 일기책 『홍양일기(洪陽日記)』와 당시의 의병 활동 상황, 빈민 구호 활동 등 일제 강점기 때의 행정 및 회계 관련 책 6권이 전한다. 『홍양일기』와 책들은 충청남도 서산시 읍내동 444번지에 사는 윤시영의 손자 윤찬구가 소장하고 있으며, 1992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22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