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8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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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鍾麟 |
영어음역 | Yi Jongrin |
이칭/별칭 | 황산(凰山),보암(普菴),봉황산인,봉황자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화천리 천곡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이해준 |
출생 시기/일시 | 1883년 2월 11일 - 이종린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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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88년 - 최현구에게서 한학 사사 |
활동 시기/일시 | 1898년 - 이설에게서 문장학 수학 |
활동 시기/일시 | 1901년 - 김복한에게서 경학 사사 |
활동 시기/일시 | 1903년 - 성균관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성균관박사로 학림학사가 됨. 『제국신문』 기자로 입사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대한협회회보』 주필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단편 소설 「모란봉」, 「해당화하몽천옹」 등 발표 |
활동 시기/일시 | 1912년 - 「일성천계」 발표 |
활동 시기/일시 | 1913년 - 장편 소설 「만강홍」, 「사촌몽」 발표 |
활동 시기/일시 | 1914년 - 『몽학이천자』 간행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독립신문』 주필로 「독립선언문」 인쇄, 배포. 일경에 체포됨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천도교 『월보과』 주임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 어린이 잡지 『새벗』 창간 |
활동 시기/일시 | 1940년 - 천도교 교령이 됨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 서산 갑구 국회 의원 당선 |
몰년 시기/일시 | 1950년 - 이종린 졸 |
추모 시기/일시 | 1967년 12월 -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4년 2월 - 황산 이종린 문학기념비 건립 |
출생지 |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화천리 천곡 |
거주|이주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
수학|강학지 | 성균관 - 서욱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
외가|처가 |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화천리 샘골 |
묘소|단소 | 묘소 -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중계리 |
성격 | 언론인|종교인|정치가 |
성별 | 남 |
본관 | 성주 |
대표 관직|경력 | 국회 의원 |
[정의]
근현대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언론인, 종교인, 정치가.
[가계]
본관은 성주. 아호는 황산(凰山), 도호(道號)는 보암(普菴). 필명은 봉황산인(鳳凰山人). 아버지는 이교칠(李敎七)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씨다. 유복자로 태어나 작은아버지 이교삼(李敎三)의 양자로 들어갔다. 부인은 심은택의 딸 심인화이다.
[활동 사항]
이종린(李鍾麟)[1883~1950]은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화천리의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한학에 관심을 갖고 혜사(蕙史) 최현구(崔賢九), 복암(復庵) 이설(李偰),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0세에 서울로 올라와 성균관에 입학, 1907년 성균관박사가 되어 학림학사 벼슬을 받았다. 얼마 후 그만두고 이종일(李鍾一)의 추천으로 『제국신문』 기자로 입사하였다. 1909년 6월 오세창(吳世昌)·장효근(張孝根)이 창간한 『대한민보(大韓民報)』에 논설을 써서 친일 단체인 일진회를 비판하는 등 애국 계몽 운동을 펼쳤다.
1910년에는 권동진(權東鎭)과 오세창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회의 월간 기관지인 『천도교월보』의 월보과(月報課) 주임을 맡아 포교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 만세 운동 때는 『독립신문』의 주필이 되어 글로써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으며, 이 때문에 일경에 체포되어 삼년 간 옥고를 치렀다. 그 후 다양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지속하였으며,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
조선어연구회 임원으로서 조선어학회 표준어사전위원을 지냈고 천도교에서 발행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 잡지인 『개벽(開闢)』의 사장을 지냈다. 1929년에는 월간 어린이 잡지인 『새벗』을 창간하였다. 1940년에는 천도교의 최고위직인 교령(敎領)에 이어 장로(長老)가 되어 종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종린은 일제 강점 초기에는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나 일제 강점 말 천도교 지도자로서 친일 행적의 오점을 남기기도 하였다. 천도교 구파를 이끄는 지도자로 활동하던 1937년 무렵 변절하여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시국 강연회에서 강연을 하였으며, 천도교 교령에 취임한 후에는 일제가 침략 전쟁을 합리화하는 구호인 팔굉일우(八宏一宇)의 신념으로 3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약칭 정동연맹], 임전대책협의회의 위원,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의 상무이사로 활동하였고, 조선종교단체전시보국회에 정광조(鄭廣朝)[손병희의 사위]와 함께 천도교 측 대표위원으로 참여하여 일제의 전쟁에 조선인 학병 참여를 격려하는 강연을 하기도 하였고 징병제 실시에 대한 감사장을 일본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종린은 광복 후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였으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이 조직적 방해에 부딪치면서 재판 결과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
1948년 서산 갑구 국회 의원에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 교체위원장, 외무·국방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5·30 총선에서 제2대 국회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국회 의원이 되자마자 6·25 전쟁이 일어나 북한군에 체포, 수감되었다. 옥중에서 병이 나자 가출옥되었으나 곧 병사하였다. 이종린은 박학하고 언변이 뛰어나 당시 도산 안창호(安昌浩), 몽양 여운형(呂運亨)과 더불어 당대의 ‘3대 웅변가’로 꼽혔다.
[학문과 저술]
1910년 국문 단편 소설 「모란봉」을 시작으로 「해당화하몽천옹」, 「가련홍」, 「감추풍월정우」, 「일성천계」 등을 발표하였다. 이 소설들은 우리나라 최초로 ‘단편 소설’이란 명칭을 완전하게 사용한 것으로 확인된다. 1913년 장편 소설 「만강홍」, 「사촌몽」을 발표하였다. 1914년 이종린이 편찬한 한자 교습서인 『몽학이천자(蒙學二千字)』가 회동서관에서 간행되었다. 그 밖에 한시 400여 수를 지었다. 문집으로 『황산집(凰山集)』과 우리나라 국문학 발전에 기여한 『문장체법(文章體法)』이 있다.
[묘소]
자택 후원에 가매장하였다가 1954년 정식으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중계리[현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동]에 묘를 썼다.
[상훈과 추모]
1967년 12월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2004년 2월 고향인 서산시 지곡면 화천리 안견기념관 앞 공원에 황산 이종린 문학기념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