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14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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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近代敎育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집필자 | 지수걸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1년 9월 - 서산보통학교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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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5년 - 해미공립보교 증축 원조 음악회 |
관련 기관 위치 | 서산초등학교 - 충청남도 서산시 중앙로38-6[동문동 915] |
[정의]
구한말에서 해방 이전까지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교육.
[학교 설립 현황]
개항기 서산 지역에는 애국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근대적인 사설 교육 기관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었다. 하지만 1911년에 공포된 「사립 학교 규칙」에 의해 강제 폐교되었으며, 그 시설이나 재산은 반강제적으로 해당 지역의 공립 보통학교에 편입되었다.
서산 지역에 설립된 최초의 공립 보통학교는 1911년 9월 서령학교의 재산과 시설을 이어받아 설립된 서산보통학교였다. 1931년 말에는 서산 지역에 17개의 공립 보통학교[학생 수 3,366명]와 2개의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가 설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등학교는 하나도 없었다. 이후 인지면과 성연면에 보통학교가 설립되어 1938년 말 서산 지역의 보통학교는 모두 19개교였다. 20개면 가운데 보통학교가 설립되지 않은 곳은 인지면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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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학교 진학률]
1938년 1월 18일자 『매일신보』의 「서산지방 소개판」에는 서산군 내 19개 면의 인구수, 학령 아동 수, 학급 수, 지원자 수[입학자와 불입학자] 등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 여기에 따르면 서산면은 1938년에 인구 1만 300명, 학령 아동 840명, 입학지원자 260명이었으며 입학 지원자 중 입학한 아동은 160명, 입학 못한 아동은 100여 명이었다고 한다. 타 지역도 입학률이 비슷하여 충청남도 태안군 정미면의 경우 학령 아동은 330명, 입학 지원자 250명이었으며 입학 지원자 중 입학자는 110명, 불입학자는 140명 정도였다고 한다.
1938년 서산에서 불입학률이 가장 높은 면은 해미면이었다. 1938년에 해미면은 전체 인구 9,800명, 학령 아동 470명, 입학 지원자 310명이었으며 입학 지원자 중 입학한 아동은 10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210명의 탈락자는 ‘재수’를 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진학하는 수밖에 없었다. 1925년 정월 해미엡윗청년회 주최로 ‘해미공립보교 증축 원조 음악회’가 열린 것은 당시 해미군의 교육 환경이 열악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상급 학교 진학 양상]
보통학교 졸업 후 서산 지역의 학생들은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해 인근 예산[예산농업학교]·공주[공주고등보통학교·공주사범학교]·강경[강경상업학교] 지역의 학교나 인천·경성 지역의 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예를 들면 1926년 공주고등보통학교와 공주사범학교에 재학 중인 서산 출신의 학생은 무려 30여 명이나 되었다. 1926년 여름방학에 이들 학생들은 보통학교 동창회 및 기타 지역 사회 운동 단체의 후원 하에 성대한 학예회를 개최했을 뿐만 아니라 축구 및 정구 대회, 도서 전람회 등도 주관하였다.
당시 신문 보도에 의하면 이들은 “저녁에는 서령청년회급 서령소년회 후원 하에 강담회(講談會)를 개최하고 열변을 토하야 만장의 갈채를 받고 간간(間間) 음악으로서 청중을 위로한 후 일반 유지(有志) 및 각 단체 간부와 합석하야 다과로서 간담을 교환하였다”고 한다.
[유학생 현황]
일제 강점기 집안이 부유하거나 시세에 밝은 지방 유력자들은 일찍부터 자녀들을 경성이나 일본에 유학을 보내는 것이 상례였다. 서산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서산군지』[1927]에 따르면 1926년 일본에 유학중인 서산 출신자는 7명, 이미 일본 유학을 마친 자들은 21명이었다. 대부분 대지주의 아들이거나 아니면 구한말 군 주사나 면장을 거친 인물의 아들들이었다. 서산 지역 유학생들이 많이 다녔던 대학은 명치대학이나 일본대학이었으며, 선호했던 학과는 법과와 정경과였다. 일본 유학 기간은 대개 2년 안팎이었으며 중퇴자가 많은 것이 특징이었다.
[개량 서당]
일제 강점기 근대적인 교육 기관 못지않게 성행하였던 것이 바로 서당이었다. 당시의 서당은 과거의 서당 교육과 더불어 당시 사회적 수요가 높았던 한글과 산수, 혹은 일본어를 가르쳤다. 1928년에 전국의 보통학교 수는 1,500개[학생 수 46만 6217명]에 불과하였으나 서당은 1만 4957개[학생 수 19만 1672명]에 달하였다. 이런 현상은 당시 서산군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1927년 6월 서산 지역에는 20개[생도 2,486명]의 보통학교[심상학교 포함]가 있었음에 반해 서당은 무려 155개[생도 1,184명]나 되었다. 서산 지역에서 서당 교육이 특별히 선호되었던 지역은 대산면과 지곡면 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