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415
한자 錦川里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금천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황호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 전라북도 순창군 구암면 금천리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35년 - 전라북도 순창군 구암면 금천리에서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금천리로 개편
법정리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금천리 지도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6.63㎢
가구수 77가구
인구[남/여] 166명[남 81명/여 85명]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금천리(錦川里)에 고인돌과 600년이 넘은 당산나무들이 서 있는 것으로 미루어 오래전에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맑은 치천이 관통하며, 닥나무가 많아 한지 공장이 많았다고 전한다.

[명칭 유래]

금천리는 원래 구암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치천(淄川) 마을과 금평(錦坪) 마을을 병합하여 금평의 ‘금’ 자와 치천의 ‘천’ 자를 합쳐 금천리라 하였다. 치천 마을은 큰 시내라는 말로 치내라는 별칭이 있고, 금평 마을은 본래 베틀아우라 불렸는데, 이 때문에 마을 안에 베틀과 관련한 여러 가지 도구 이름이 존재한다.

[형성 및 변천]

1760년(영조 36) 발간된 『옥천군지(玉川郡誌)』 방리(坊里) 신증(新增) 편에 옥천군의 북방 12㎞[30리] 지점에 이암방(耳巖坊)이 위치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금평 마을, 치천 마을이 지명으로 존재한다. 1897년(고종 34) 방(坊)을 면(面)으로 개칭하면서 이암방을 구암면(龜巖面)으로 바꾸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 총독부 관제가 제정되면서 면, 촌, 방, 사, 리, 부 등이 면급으로 통일되었다. 이후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두 마을을 금천리로 병합하였다. 1935년 구암면 7개 리와 무림면 7개 리를 통폐합하면서 구암면의 ‘구(龜)’ 자와 무림면의 ‘림(林)’ 자를 합하여 구림면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른다.

면소재지로부터 동북쪽으로 0.8㎞ 지점에 위치한 치천 마을은 원래 옥천 조씨(玉川趙氏)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다가 그 후에 파평 윤씨(坡平尹氏)와 청주 한씨(淸州韓氏)들이 들어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금평 마을은 면소재지로부터 북쪽으로 3.5㎞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고령 신씨(高靈申氏)가 큰 세를 이루며 살고 있다.

[자연 환경]

금천리는 북쪽으로 안정리와 경계를 이루고, 동쪽으로 율북리, 남쪽으로 성곡리·운남리와 나란히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 방화리와 인접해 있다. 노령산 북쪽에 위치한 임실군 덕치면과 순창군 경계에 성미산이 서 있다. 성미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려 구림면 율북리 밤디 마을 뒤에 솟아오른 산이 무직산[580m]이다. 무직산 봉우리에서 서남쪽으로 내려와 해발 480m의 봉우리를 형성하니 바로 치천 마을 주산(主山)이다. 이 봉우리 밑에 마을이 형성되어 치천이라 하며, 마을 앞으로 구림천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다. 금평 마을은 회문산 장군봉(將軍峰)[444.8m]에서 옥녀봉을 거치며 그 안에 형성되었다.

금천리는 전체적으로 북서쪽으로부터 동남쪽으로 길게 타원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옥녀봉과 베틀아우 등을 지나면서 호정소라는 거대한 공룡 발자국이 있는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면서 무직산을 향해 나아간다. 밤디 고개를 지나는 남쪽을 지나 옥녀봉을 향해 서쪽으로 향하는 형상이다. 특히 호정소는 배틀아우 동쪽에 있는 소로, 옛날 용이 못 된 이무기가 살고 있어서 비린 생선을 먹고 가면 물린다고 전해 오며, 근래까지도 수달이 살았다고 한다. 이 호정소보 아래쪽 널따란 바위 위에 공룡 발자국 수십 개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크기는 대략 25~28㎝ 내외이며, 깊이는 5~8㎝이다. 모양은 타원형에 가깝다.

금천리에 있는 산으로는 무직 장군이 주둔하였다는 산[암봉]을 무직산[580m]이라 하며, 함박산은 함박꽃처럼 피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옥녀봉[650m]이란 옥녀직금의 명혈이 있다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바로 금평을 베틀아우라고도 부르는 이유이기도 한다. 두무골, 두무실, 살구나무골 등의 이름을 가진 골짜기들이 있고, 평야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바람 바우, 부엉 바위, 상여 바우 등과 회문산의 다섯 신선이 바둑을 둔다는 기석암이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 밤디 고개, 노루목재 등의 고개 이름이 남아 있다. 여분산에서부터 내려온 물과 무이산에서 흘러내린 물, 구산리에서 발원한 물, 방화리에서 발원한 물이 합쳐져 금천리 앞에서 치천이라는 이름으로 흐르다가 섬진강으로 합류된다.

[현황]

2021년 12월 현재 금천리의 면적은 6.63㎢이며, 인구는 77가구, 166명으로 남자가 81명, 여자가 85명이다. 예부터 맑은 물이 흘러가는 치내 마을 주위에 닥나무가 많아 제지 공장이 20여 곳 있었는데, 마을 주민 1/3이 공장에서 일할 만큼 제지 생산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그림 그리기에 좋아 조선 시대에는 종이, 장판 등을 진상하였다. 소지(燒紙), 백지[白紙], 선자지[扇子紙], 장지(壯紙), 대지(臺紙), 고사지[굽도리를 바르는 종이], 장판, 인쇄지[복사지] 등 고급 품질의 종이들이 제조되었다고 한다. 잿물은 양잿물이 나오기 전 메밀대를 태워서 만들었다. 재료는 닥물, 느릅나무, 가무태나무[감태나무] 잎 등이었다.

구림천[치천]이 흐르고 그 위에 오래된 느티나무 6그루가 서 있다. 양옆으로 모정이 두 채 있는데 가장 큰 나무 앞에는 고려 후기 치천 마을이 생긴 유래와 나무의 관계를 알리는 ‘순창군 보호수’라는 팻말이 걸려 있다. 구림면 소재지에서 금천리로 가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치내 마을을 약 500m쯤 지나 길 왼편 논과 밭 사이에 고인돌 10기가 무리지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 고인돌을 치내 마을 쪽에서부터 순서대로 1호~10호라고 부른다. 고인돌 10기의 장축은 모두 남북 방향으로 되어 있다. 금천리 베트라 마을 앞 논 가운데 금창리로 가는 길옆에 있는 고인돌 3기는 상여 바위라고 부른다. 독처당공 정려 효자문이 절사(節士) 조여관(趙汝寬)[1557~1592]의 효심과 충성심을 전하고 있다. 개항기 임태원, 윤재일, 신덕중, 박막동 등이 의병 활동을 하였다.

지방도 729호선운남리에서 금창리를 이어 주며, 호정소 주위를 농도 306호선이 돌아 나오고 있다. 또한 군도 6호선금천리에서 임실로 지나간다. 금천 취입보가 있으며, 옛 금천 초등학교를 개조한 순창 청소년 수련관[회문산 청소년 수련원]이 자리한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2.10.13 현행화 [현황] 인구 변경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