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621
한자 -戰爭
이칭/별칭 한국 전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주철희

[정의]

1950년 6월 25일~1953년 7월 27일 북한의 남침으로 전라북도 순창군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선제공격에 의해 전쟁이 개시되어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동안 수백만의 인명이 희생되고 한반도 전역에서 셀 수 없을 정도의 물적 기반이 파괴된 전쟁이다. 이 전쟁은 유엔 연합군과 중국군이 참전했다는 점에서 국제전으로서의 성격을 띤 전쟁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되어 휴전선에 의해 남북 분단 상태로 남아 있으며, 항상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전쟁의 명칭은 남한에서는 민족 간에 벌어진 전쟁이라는 점에서 전에 ‘6·25 동란’ 또는 ‘6·25 사변’으로 불렸다. 최근에는 ‘동란’ 또는 ‘사변’보다는 전쟁으로 많이 부르고 있는데, ‘6·25 전쟁’ 또는 ‘한국 전쟁’이 그것이다. 북한에서는 혁명적 관점에서 ‘조국 해방 전쟁’이라 부르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한국 전쟁(韓國戰爭)[Korean War, 일부에서는 Korean Civil War]이라 한다.

[경과]

1950년 7월 20일 북한군이 전주에 입성하고 22일경 순창을 점령하였다. 인민군이 낙동강 경계선까지 전선을 확장하여 남진하였으나,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28일 서울이 수복되면서, 조선 노동당 각 도당 위원회에서는 9월 28일을 전후하여 모든 조직이 산악 지대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순창 지역은 회문산 등 산악 지대가 많아 빨치산의 근거지가 되었다. 조선 노동당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이 회문산에 근거지를 두고 전북 유격대를 조직한 것도 이 시기이다. 조선 노동당 전북도당 사령부순창군 구림면 여분산 금상골 골짜기에 자리 잡았다. 조선 노동당 전북도당 사령부는 사령관 방준표, 부사령관 조병화를 중심으로 7개의 직속 부대와 14개의 지역 유격대로 구성되어, 1955년 7월 13일 조선 노동당 전북도당 제1 유격 지도부가 소멸될 때까지 순창 지역의 회문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전라북도 순창 지역은 1950년 11월경부터 쌍치면, 복흥면, 구림면 등 산악 지대를 제외하고 일부 지역이 경찰과 국군에 의해 수복되었다. 빨치산 토벌을 이유로 군과 경찰이 토벌 작전을 수행하던 중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결과]

6·25 전쟁은 한민족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강대국들의 국내외 정책 등 국제 정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전라북도 순창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6·25 전쟁이 발발한지 한 달 만인 7월 말에 순창 지역은 인민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 시기에 적대 세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발생했다. 지금껏 밝혀진 희생자는 대략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용전리 1명, 유등면 오교리 2명, 팔덕면 4명, 구림면 금천리 방화천 변 주민 최소 32명과 자양리 후덕골 2명 등이다. 또한 프락치로 오인 받거나, 국군에 협력한 향토 방위대라는 이유로 빨치산에 끌려가 희생되기도 했다. 마을별로 복흥면 13명, 쌍치면 3명, 금과면 2명, 동계면 4명, 인계면 1명 등이 지방 좌익과 빨치산에 의해 희생되었다.

10월 말이 되면서 후퇴한 인민군과 지방 좌익이 회문산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국군의 주력 부대가 이곳을 토벌하기 위해 화력을 집중하였다. 이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이 피해를 입기도 했으며, 특히 쌍치면, 복흥면, 구림면 등 산악 지대의 피해가 컸다.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사병들에 의하면 “당시 부역자 처리 기준이 있었다고는 하나, 국군 제11 사단 정보 계통 장교나 부사관에게도 즉결권이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순창군의 군경에 의한 희생자 수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으나, 2008년에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위원회’에서 발행한 보고서에 의하면 순창읍 30여 명, 팔덕면 30여 명, 동계면 9명, 복흥면 30여 명, 쌍치면 180여 명 등 총 280여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전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는 이보다 많을 수도 있다.

6·25 전쟁회문산을 끼고 있는 순창 지역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순창 민간인 학살은 6·25 전쟁 중 국군과 남하한 인민군이 후퇴와 이동을 거듭하던 시기에 발생한 사건이다. 특히 쌍치면구림면에서는 무장한 경찰 부대가 공비 소탕, 부역자 처벌이라는 공적인 임무 수행을 내세워 비무장·비교전 상태의 민간인을 집단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 또한 사적 원한을 갚기 위한 보복적 차원의 학살도 있었다.

[의의와 평가]

6·25 전쟁은 순창 지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산악 지대인 쌍치면, 복흥면, 구림면의 경우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으며, 좌·우익 간의 대립은 마을 주민 간에도 서로 경계를 하는 등 사회적 갈등이 내재되는 악영향을 미쳤다. 최근에 민간인 위령탑과 위령제 등을 통해 화해하고 화합하는 노력들이 진행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