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3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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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順天樂安邑城 |
영어공식명칭 | Naganeupseong Walled Town, Suncheon |
영어음역 | Naganeupseong Walled Town, Suncheon |
영어공식명칭 | Naganeupseong Walled Town, Suncheon |
분야 | 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태홍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3년 6월 14일 - 순천 낙안읍성 사적 제302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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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순천 낙안읍성 사적 재지정 |
현 소재지 | 순천 낙안읍성 -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서내리|남내리 |
성격 | 읍성 |
양식 | 석축성 |
관련 인물 | 김윤길|임경업 |
크기(높이,길이,둘레) | 1,468m[둘레]|420~590m[너비]|3~5m[높이] |
면적 | 0.14㎢ |
문화재 지정 번호 | 사적 |
[정의]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에 있는 조선시대 읍성.
[건립 경위]
순천 낙안읍성은 조선시대에 축조된 읍성으로 석축성이다. 읍성은 치소의 기능과 함께 주민들이 거주하고 유사시 외곽 주민들의 입보처(入保處) 기능을 하였던 곳이다. 순천 낙안읍성도 내부에 행정 군사 시설 등과 함께 민가가 들어서 있다.
조선 전기 유학자인 이석형(李石亨)[1415~1477]의 기문에 따르면 낙안읍성은 축성 초기에는 석성이 아니라 토성이었다고 한다. 낙안 출신의 김윤길(金贇吉)[?~1405]이 절제사가 되었을 낙안 사람들과 함께 토성을 축성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구절에 군수 신원절(愼原節)이 옛터에 따라 관사를 지은 것으로 나타나 김윤길이 토축한 읍성이 무너져 있었던 것을 다시 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사가 있었다면 이는 바로 낙안군[현 순천시 낙안면]의 치소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치소는 역시 성곽 안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390년대 말 김윤길에 의하여 다시 축성된 토성은 낮고 작았던 모양이다. 1424년(세종 6) 전라도 감사가 전한 “‘도내의 낙안군 토성이 낮고 작아서, 만약 왜변이 있다면 보존해 지키기 어려우니, 돌을 섞어서 옛터를 좀 넓혀서 성을 쌓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라는 기록에 당시 성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이 무렵 낙안 주변 지역의 성곽도 같은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즉 1415년(태종 15) 전라도 관찰사 박습이 “장흥·고흥·광양읍의 땅이 모두 바닷가에 있어 왜구가 배를 대는 곳인데, 전날에 설치한 성이 모두 좁고 나무를 세워 진흙을 발랐으므로 세월이 오래되니 기울고 무너진 것이 심하다.”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터를 더 넓히고 견고히 쌓고자 하는 방안이 대두되었고, 이후 낮고 작은 성을 넓혀서 잡석으로 축성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세종실록지리지』부터 낙안읍성은 모두 석축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언제 바뀌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1424년부터 1454년 사이에 현재와 같은 규모의 석축성으로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위치]
순천 낙안읍성은 순천시 낙안면의 동내리, 서내리, 남내리 일대에 있다. 성곽이 있는 곳은 남쪽을 제외한 나머지 방위는 산[제석산, 오봉산, 금전산, 상탕군산, 백이산]으로 막혀있어 분지 형태를 이루고 있다. 순천 낙안읍성 동쪽으로는 교촌천, 서쪽으로는 낙안천이 남쪽으로 이어져 여자만으로 합수된다. 순천 낙안읍성은 분지의 북쪽 가장자리 쪽에 설치되어 있다.
[형태]
순천 낙안읍성 성벽 길이는 1,468m, 내벽 쪽은 1,351m이다. 성벽의 너비는 구간에 따라 차이가 나타나는데, 대체로 동쪽 하부너비 430㎝, 상부 너비 350㎝, 서쪽 하부너비 590㎝, 상부 너비 510㎝, 남쪽 하부너비 420㎝, 상부 너비 390㎝, 북쪽 하부너비 560㎝, 상부 너비 490㎝ 등으로 나타났다. 성벽의 높이는 3~5m로 약간씩 차이가 있다. 성벽은 구간에 걸쳐서 내·외벽을 모두 석축한 협축식으로 축조되었다. 전체적으로 성벽은 거의 수직을 이루고 있으며, 일부 구간에 넓고 얇은 평평석과 같은 것으로 기단석으로 삼고 있다. 이 기단석 위쪽의 안쪽으로 15㎝ 내외 들어가서 성돌을 쌓았다. 미석은 성벽 전체에 걸쳐 외벽에만 설치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낙안읍성에는 421개의 타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종 대까지 없었던 옹성이 그 후 6개소에 설치되면서 여장의 숫자가 240개 늘어난 660개로 나타나 한 옹성에 40개의 여장이 시설되었던 것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 적대는 기록상 문종 대에 12개가 있으며 아직 8개는 쌓지 않았다고 하였다. 낙안읍성에는 옹성이 6개소 있다고 하였으나 처음부터 시설된 것이 아니고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 18세기경에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문은 1760년에 편찬된 『여지도서』의 지도에까지 3개소로 나오다가 1864년에 완성된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부터 2개소로 나오며 『동국여지지』에서는 남북문만 언급되어있다. 따라서 낙안읍성의 성문은 처음에 3개소가 시설되었다가 18세기 중엽 이후 어느 시기부터 1개소의 문이 폐쇄되어 남북의 2문만 남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는 순천 낙안읍성 동·서·남문이 복원되어 있다. 해자는 당시 만들지 못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현재는 성벽 외곽 쪽으로 설치되어 있다. 성내에는 관아 시설과 민가, 우물 2곳, 연못 2곳이 있다고 하였다.
[현황]
순천 낙안읍성은 1984년부터 복원공사가 진행되어 현재와 같은 성곽과 내부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1,410m이며, 건물 현황은 300여 동이 설치되었다. 1983년 6월 14일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순천 낙안읍성 관련 주요 문화재로는 중요민속자료 가옥 9동, 노거수, 객사, 임경업장군비각 등이 있다.
[의의와 평가]
순천 낙안읍성은 복원되었지만 현존하는 읍성 가운데 보존 상태가 좋은 유적 중 하나이다. 또한, 순천 낙안읍성은 조선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평지성으로서도 그 가치가 높다. 순천 낙안읍성 내부에 관아시설을 비롯한 민가가 배치되어 있어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전통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