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6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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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恒來 |
영어공식명칭 | Park Hang-rae |
영어음역 | Park Hang-rae |
영어공식명칭 | Park Hang-rae |
분야 |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재성 |
출생 시기/일시 | 1861년 6월 28일 - 박항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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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4월 7일 - 3.1운동 순천면 장날 만세운동 발발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7일 - 박항래 투옥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12월 24일 - 박항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박항래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박항래 출생지 - 전라남도 순천시 상사면 용암리 |
거주|이주지 | 박항래 거주지 - 전라남도 순천시 상사면 용암리 |
활동지 | 박항래 활동지 - 전라남도 순천시 |
묘소 | 박항래 묘소 - 전라남도 순천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순천 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박항래(朴恒來)[1861~1919]는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판결문에 의하면 재산이 없어 생활이 매우 곤궁한 양반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이기도 했다. 한편, 유생으로서 그 성품이 곧고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인물임을 판결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던 중 일제의 총독 통치에 대한 강한 불만을 품고 독립 의지를 품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박항래는 1919년 4월 7일 순천면 장날 남문 문루(門樓)인 연자루(鷰子樓)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당시 박항래는 58세로 순천군 상사면[현 전라남도 순천시 상사면]에 사는 유생[직업 농업]이었다. 당시의 판결문에 따르면, 박항래는 ‘한일병합’ 이래 조선총독부의 식민 통치에 불만을 품고서 언제나 일본의 굴레에서 벗어날 시기가 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독립청원서가 제출되고, 경성을 위시하여 조선 각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며 독립운동이 치열함을 보고서, 이것은 자신의 소견과 같이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진하여 다수 민중에게 조선 독립사상을 고취하여 그 협력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해 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7일 오후 1시경 순천 면내 장터에서 백지 1매를 구입하였다. 그날이 장날이어서 다수의 조선인이 집합한 것을 기회로 삼아, 면내 남문(南門) 누상(樓上)에 올라 장꾼들에게 “현재 경성 기타 여러 곳에서 조선 독립을 하려고 만세를 절규하고 있으니 이곳 순천에서도 같이 독립만세를 고창할 것을 희망한다.”라는 내용의 말을 하고, 백지를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라고 여러 차례 외쳤다.
박항래의 만세 소리에 연자루 부근에 있던 군중 수백 명이 일시에 연자루 아래로 몰려들었다. 이에 헌병이 체포하려고 하자 박항래는 극력 저항하면서 오히려 대한 독립만세를 연호하여, 지방민들에게 일제 통치에 반대하는 사상을 선동해서 더욱 반항의 정신을 파급시켰다. 그러나 이날 시위는 박항래의 단독 거사로 끝나고 군중의 만세시위로 발전하지 못했다.
[묘소]
박항래는 징역 10개월 형을 선고 받고 광주 감옥에서 옥고(獄苦)를 치르는 중, 옥중에서 만세를 부르며 저항하다 1919년 12월 24일 옥사(獄死)하였다.
[상훈과 추모]
박항래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