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3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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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一運動 |
영어공식명칭 | 3.1 movement |
영어의미역 | 3.1 movement |
영어공식명칭 | 3.1 movement |
이칭/별칭 | 3.1혁명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인덕 |
발단 시기/일시 | 1919년 3월 2일 - 3.1운동 강영무가 순천 지역에 서울의 3.1운동을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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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3월 16일 - 3.1운동 예수교 청년회원 순천 난봉산에서 만세시위 |
전개 시기/일시 | 1919년 4월 7일 - 3.1운동 순천 연자루에서 만세시위 |
전개 시기/일시 | 1919년 4월 - 3.1운동 위친계, 2.8사 조직 |
전개 시기/일시 | 1919년 4월 14일 - 3.1운동 벌교장터에서 만세시위 |
종결 시기/일시 | 1919년 5월 - 3.1운동 순천 3.1운동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난봉산 - 전라남도 순천시 삼거동 |
발생|시작 장소 | 연자루 - 전라남도 순천시 자경3길 63[조곡동 64] |
발생|시작 장소 | 하송리 3.1운동 -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하송리 |
성격 | 사건|독립운동|만세운동 |
[정의]
1919년 3월 1일 이후 전라남도 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거족적인 만세운동.
[개설]
당시 국제정세의 변화에 민감했던 한민족은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민족대표와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여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1919년 5월에는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이 확산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학생과 청년들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연간 집회횟수 1,542회, 집회 참여 인원 200여만 명을 기록하여 전국적으로 전개된 만세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사망 7,500여 명, 부상 1,600명, 피검 4만 7,000여 명이라는 희생을 냈다. 3.1운동은 새로운 독립운동의 구심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전면에 등장하고, 역사적·민족사적으로 한민족을 국내·외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3.1운동이 순천 지역에서도 일어났다.
[역사적 배경]
일제는 1910년 국권 침탈 이후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언론 폐쇄, 종교 탄압, 신사참배 강요, 군대식 제복 착용 등 강력한 무단통치를 자행했다. 이때 국제정세의 변화는 한민족에게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여기에 감화된 한민족의 지도자들은 일제에 독립을 요구하기로 하였다. 이 무렵 고종이 서거하면서 민족대표, 일군(逸群)의 학생, 청년 독립운동가들은 만세시위를 준비했고, 그날이 1919년 3월 1일이었다. 만세운동이 태화관(泰和館)과 탑골공원에서 일어나면서 1919년 3월 1일 ‘3.1혁명’이 시작되었다.
[경과]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는 1919년 5월에는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종일(李鍾一)이 전국을 대상으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고, 천도교 순천교구의 김희로·강형무·문경홍 등이 독립선언서를 접하면서, 이들에 의해 순천에서도 3.1운동이 확산되었다. 1919년 3월 2일 순천으로 온 강영무가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시위 소식을 전했고, 천도교 계통의 움직임과 별도로 1919년 3월 16일 오후 2시경 예수교 청년회원 수백 명과 함께 순천 난봉산에 모여 만세시위를 시도했다. 1919년 4월 7일 순천면 장날 박항래(朴恒來)가 순천면 내 옥천루 부근 연자루 위에서 만세시위를 유도했다. 박항래는 “현재 경향 작지에서 조선독립을 위해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으니 순천에도 그와 같이 만세를 외치자”라고 연설한 이후 ‘대한독립만세’를 선도했다. 이날의 거사는 단독행위로 끝났다.
순천 지역에서 나타나는 3.1운동의 구체적인 투쟁 사례는 첫째, 순천군 동초면 신기리[현 순천시 낙안면 신기리]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이다. 신기리의 전평규(田平奎)는 안용갑(安鏞甲)·안응섭과 함께 도란사라는 위친계를 조직하고, 별도로 2.8사를 조직했다. 1919년 4월 8일 한흥조의 집에서 위친계원, 김규석, 안진영 등이 모여서 다음날인 1919년 4월 9일 벌교장터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전평규·안용갑·안응섭 등이 ‘대한독립기’라는 쓴 종이를 들고 벌교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벌교장터는 만세시위장이 되었고 독립만세의 함성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이후 2.8사 구성원은 1919년 4월 14일 벌교장터에서 다시 만세시위를 했다.
둘째, 순천군 낙안면 하송리[현 순천시 낙안면 하송리]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다. 3.1운동 소식을 들은 하송리 사람들이 참여했는데, 시위를 준비 역할은 김종주(金鍾胄)와 유홍주가 했다. 김종주·유홍주는 동향의 동지인 안호영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거사를 준비했다고 한다. 순천 지역에서는 1919년 5월까지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순천의 3.1운동은 “1919년 5월 31일 현재 집회횟수 6회, 집회원 1,500명, 사망자 8명, 부상자 32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함께 1919년 12월 31일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에서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순천의 3.1운동의 피검자는 58명이었다.
[결과]
순천의 3.1운동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순천 지역에서는 천도교, 기독교인 등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이 시위투쟁에 참여했고 다수의 농민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학생과 청년의 역할, 아울러 기독교인의 역할은 순천의 3.1운동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의의와 평가]
국내·외에서 전개된 3.1운동사에서 순천 지역의 3.1운동은 일제에 대한 전면적이고 저항적 지역의 정서를 반영한 사건으로, 어느 지역의 3.1운동 못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