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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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代 |
영어의미역 | ancient a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심현용 |
[정의]
935년 신라가 멸망하기 이전 시기의 경상북도 울진군의 역사.
[개설]
울진 지역은 진한 소국의 하나인 우중국이 있다가 신라에 병합된 뒤, 한 때 고구려와 신라의 충돌지역이 되기도 했으나, 결국 신라의 영역으로서 국가제사인 소사가 설치된 중요한 곳이었다.
[초기국가시대]
진한은 3세기 중엽경까지는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소국연맹체였으며, 진한 12국 가운데 하나인 우중국(優中國)이 울진에 비정된다. 또 울진의 옛 지명이 『삼국사기』[1145]를 비롯하여 『고려사』[1451]·『세종실록지리지』[1432]·『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우진야(于珍也)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창녕진흥왕척경비」[561]에 기록된 우추실지하서아군(于推悉支河西阿郡) 중에서 ‘우추(于推)’는 울진으로 비정된다.
우진야와 우추라는 지명은 음운상에서 진한 12국 가운데 하나인 우중국[또는 우유국]과 서로 통한다. 『삼국유사』[1281~1283]에 울진을 울진국(蔚珍國) 또는 울진대국(蔚珍大國)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초기국가시대에 울진에 국가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 우중국은 울진의 죽변면에 있는 장산성 일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으로 추정된다. 울진은 경주 사로국 중심의 진한연맹체에 편입되어 있다가 3세기 후반~4세기 전반에 신라에 통합되었다.
[삼국시대]
『삼국사기』에는 울진군이 원래 고구려의 우진야현(于珍也縣)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은 사로국에 의해 복속된 후 신라의 땅으로 유지되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468년(장수왕 56)에 삼척을 장악하고, 481년(장수왕 69)에 미질부[지금의 흥해]까지 남하하는 기록이 있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때쯤에 동해안 지역이 잠시 고구려의 지배 하에 놓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때 고구려는 울진을 복속하고 우진야현으로 삼았기 때문에 울진군이 원래 고구려의 우진야현이었다는 표현이 쓰인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한편, 창녕진흥왕척경비[561]에는 동해안 지역의 당시 영역을 살펴볼 수 있는 ‘우추실지하서아군’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우추[지금의 울진]와 실지[지금의 삼척], 그리고 하서아[지금의 강릉]란 지명은 지역적으로 서로 경계를 접하고 있다. 이 세 지역에 대해서는 하나의 통합된 군으로 보는 견해와 별개의 군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당시의 행정체제는 하천이나 산을 경계로 구분되었는데, 울진과 삼척 사이는 험난한 산악 지형으로 인해 구분되므로 별개의 군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울진봉평신라비[524]에는 삼척의 실지 군주(軍主)가 울진의 거벌모라 도사(道使)와 삼척의 실지도사를 통할하고 있는 것이 나온다. 당시 촌(村)은 도사가 관리하고 있었다. 거벌모라와 실지는 별개의 영역인 행정성촌으로 분리되어 각각의 거벌모라도사와 실지도사가 존재하여 실지 군주의 관할을 받다가 창녕진흥왕척경비가 세워진 시기, 즉 늦어도 진흥왕대 540~561년 이전에는 군으로 개편되었다.
신라는 소지마립간 때부터 지방관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토대로 지증왕은 주군성촌제(州郡城村制)를 실시하여 주에는 군주, 군에는 당주(幢主), 성촌에는 도사를 장관으로 파견하였다. 최초의 군주는 505년(지증왕 6) 실직주[지금의 삼척]에 파견된 이사부(異斯夫)였다. 이때 울진에도 도사가 파견되었다. 당시 울진은 노인법(奴人法)의 적용을 받는 지역이었다.
『삼국사기』에는 당시 주치(州治)가 505년에는 실직주로, 512년(지증왕 13)에는 하슬라주[지금의 강릉]로 이동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울진봉평신라비에는 다시 실직으로 이동되어 있는 새로운 내용이 보인다. 이는 당시 거벌모라로 불린 울진이 실직주에 편입되어 있다가 하슬라로 주치가 이동되면서 하슬라주 군주의 통제를 받았으며, 울진봉평신라비가 세워진 시기에는 다시 실직주 군주의 관할 하에 놓인 역사적 상황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동은 5세기 중반 신라는 북진(北進)을 추진한 반면에 고구려는 남진(南進)을 추진했기 때문에 두 나라가 동해안 지역의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전투가 반복된 역사적 사실이 반영된 결과이다.
최근에 발굴 조사된 덕신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5~6세기로 판단된다. 봉평리 고분군과 매화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6세기 신라 양식의 토기들이다. 이 밖에 읍남리 고분군·덕천리 고분군·오산리 고분군·노음리 고분군 등에서 모두 5~7세기 신라 양식의 토기만 조사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울진은 당시 신라의 영토였던 것이 충분히 확인된다.
한편, 남쪽에 위치한 평해는 고구려 때 근을어(斤乙於)였는데, 이 지명은 신라에 다시 편입되어 통일신라 때에도 그대로 유지되다가 고려 초에 평해로 개명되었다.
고고학적으로도 평해에 분포하는 거일리 고분군·삼산리 고분군·황보리 고분군·금음리 고분군·덕산리 고분군 등 삼국시대의 유적에서 대부분 5~7세기에 해당하는 신라 양식 토기들이 확인되었다. 북쪽의 울진이 이른 시기에 신라에 복속된 것과 마찬가지로 남쪽의 평해도 당시 동일한 역사적 환경에 있었을 것이다.
[신라의 울진 지역 진출]
울진은 신라의 왕경인 경주에서 원거리에 있으며, 동해안 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고고 자료에 의하면, 강릉 이남 지역은 늦어도 4세기 4/4분기 이전에는 이미 신라의 영역에 들어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고고학적 양상으로 볼 때 경주에서 울진, 즉 동해안 지역으로의 진출 경로는 육로를 주요 루트로 하면서 해로도 보조적으로 활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는 울진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지형을 먼저 활용했을 것이다. 특히, 포항 쪽으로는 형산강이 흐르고 있어 자연적인 교통로가 되었을 것이며, 교통로에는 역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신라는 확보된 육로를 통해 동해안 북쪽으로 진출하려는 시도를 계속하였다.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신라 유적을 연결해 보면, 경주→포항·흥해→영덕→울진→삼척→강릉→양양→안변→함흥→홍원→이원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이 경주에서 출발하여 형산강을 따라 포항을 지나 영덕을 경유하여 울진과 강릉으로 통하는 동해안 길은 북쪽의 함경도로 올라가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이 교통로는 지리적으로 이동이 쉬운 해안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한편, 신라는 포항을 장악한 후 영일만 지역에서 해로를 보조적으로 이용하여 동해안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신라의 행정구역 개편]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후 685년(신문왕 5)에 영토를 9주(州)로 분할하였다. 이때 동해안 일대를 명주(溟州)로 편제하였으며, 울진을 명주에 소속시켰다. 울진이라는 명칭은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김유신 장군이 이곳에 와서 보배가 많아 울창할 ‘울(蔚)’자와 보배 ‘진(珍)’자를 써서 지명으로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명주의 영역은 북쪽으로 통천, 서쪽으로 안동시 임하와 청송, 남쪽으로 청하에 이르렀다. 757년(경덕왕 16) 전국 주·군·현의 명칭이 개정되었다. 이때 울진은 우진야(현)에서 울진(군)으로 바뀌었으며, 영현으로는 해곡현(海曲縣)을 두었으나, 관할지는 명주 그대로였다.
[울진과 명주장군 김순식]
신라 하대 김주원(金周元)은 원성왕과의 왕위계승에서 실패하고 명주로 낙향한 후 신라 중앙 정부는 786년(원성왕 2) 김주원을 명주군왕으로 삼고, 양양에서 평해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를 식읍으로 주었다. 이로써 울진과 평해는 원성왕대[785~798] 이후 김주원 가문의 식읍으로 지배받게 되었으며, 그러한 관계는 이후 그의 후손 4대에 걸쳐 유지되었다.
특히, 신라 말 김주원의 후손인 김순식(金順式)이 명주에서 장군을 칭하면서 그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했으므로 울진·평해도 김순식 세력에 연결되었다. 922년(태조 5)에는 김순식이 고려에 귀부(歸附)하면서 고려의 영역이 되었다. 그러나 울진의 호족들이 고려에 귀부한 것은 이보다 약간 늦은 듯하다.
930년 왕건(王建)은 고창[지금의 안동] 전투에서 후백제의 군대를 격파하여 승리함으로써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러자 안동을 비롯한 울산 등 동해안 일대 지방세력들은 고려에 항복하였다. 울진도 이때 고려의 한 지방으로 편제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이 울진의 호족들이 고창 전투에서 승리한 후 고려에 귀부한 사실로 미루어 당시 울진에는 명주와는 별도의 독자적인 호족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토속 신앙과 불교 수용]
울진의 대표적인 토속 신앙으로 굴신(窟神)과 산천신(山川神)이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이러한 토속 신앙들은 어느 시기에 불교에 흡수되었다. 울진의 장천굴[지금의 성류굴]에 2천년간이나 있었던 굴신이 신라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태자가 와서 수구다라니를 염송하기 전까지는 불교를 전혀 알지 못하다가 보천태자에 의해 보살계를 받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또 우진야군[지금의 울진]의 악발산에 산천 신앙이 있었으며, 이 산천 신앙이 신라의 국가적인 명산대천제(名山大川祭)에 소사로 편제되어 흡수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후 각 지역의 신앙체계와 토착세력을 왕실과 중앙세력을 중심으로 재편제하고 체계화한 데서 비롯되었다. 즉, 굴신이 불교에 귀의한 후 굴의 형체가 없어져버렸다는 것과 악발산 신앙이 국가적인 제사에 선정되어 국가제도에 흡수된 것은 울진의 토착 신앙체계가 불교 신앙체계로 완전히 흡수되어 토착 신앙을 숭앙하는 재지의 유력한 세력들이 해체되고 약화된 것을 말한다.
보천태자가 울진에 온 시기는 역사적 배경으로 보아 700년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명산대천제가 대사·중사·소사로 편제되는 시기는 대체로 685년(신문왕 5) 이후부터 735년(성덕왕 34) 이전으로 보고 있다. 불교가 유입되기 전까지 울진에 강하게 유지되어오던 토속 신앙인 굴신과 산천신은 7세기 말~8세기 초에 신라 중앙세력에 의해 울진에 불교 신앙이 전파되면서 그 체계로 완전히 흡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울진에는 오랫동안 재지의 토속 신앙이 유지되어오다가 늦어도 7세기 말~8세기 초에 이르러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 전파 속도는 빠르지 않았으며, 민간에까지 깊게 보급된 것은 청암사지 삼층석탑이 제작된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