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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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穀 |
영어음역 | Yi Gok |
이칭/별칭 | 중보(仲父),가정(稼亭),운백(芸白),문효(文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최인표 |
[정의]
고려 후기 울진 지역을 주제로 시와 기문을 남긴 문신.
[가계]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초명은 운백(芸伯). 한산이씨 시조인 이윤경(李允卿)의 6대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비서랑(秘書郞) 이효진(李孝進)이고, 할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이창세(李昌世)이다. 아버지는 찬성사(贊成事) 이자성(李自成)이고, 어머니는 흥례이씨로 이춘년(李椿年)의 딸이다. 부인은 함창김씨로 향교대현(鄕校大賢) 김택(金澤)의 딸이다. 아들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이다.
[활동사항]
1317년(충숙왕 4) 거자과(擧子科)에 급제한 뒤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원나라로 가서 1332년(충숙왕 복위 1) 정동성(征東省) 향시에 수석,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하였다. 이때 지은 대책(對策)은 독권관(讀卷官)이 감탄한 명문장이었다. 재상들의 건의로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이 되어 원나라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1334년 본국으로부터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를 받고 귀국하여 전의부령(典儀副令)에 이어 직보문각(直寶文閣)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다시 원나라로 가서 휘정원관구(徽政院管勾), 정동행중서성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郎)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345년(충목왕 5) 밀직부사, 이듬해 지밀직사사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고, 1348년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었다.
이제현 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중수하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수하였다. 한때는 시관이 되었으나 사사로운 정리로 선발하였다는 탄핵을 받아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감창(中書省監倉)으로 있다가 귀국하였다. 공민왕의 옹립을 주장하였으므로 충정왕이 즉위하자 신변에 불안을 느껴 관동 지방을 주유하였다. 1351년 향년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유학 사상을 바탕으로 현실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왕조 말기적 현상을 보이던 권문세족 정권에서 이상이 좌절되었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가정집』 4책 20권이 전한다. 관동 지방을 주유하면서 많은 시와 기(記)를 남겼다. 울진 지역 관련 작품으로 「선사관(仙槎館)」, 「월송정(越松亭)」, 「연희정(延曦亭)」, 「인빈각(寅賓閣)」, 「성류굴기(聖留窟記)」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한 『동문선』에는 100여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고 『가정집』과 『동문선』에는 가전체 문학 작품 「죽부인전(竹夫人傳)」이 실려 있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광암리 산10-1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