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고산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0488
한자 古山城
영어의미역 Gosanseong Fortress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고성리 산3-1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희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산성
건립시기/연도 조선 전기
관련인물 장순열|장백손|윤인노|이언화
길이 1,150m
면적 99,174㎡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고성리 산3-1 지도보기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고성리에 있는 조선 전기 산성.

[개설]

고산성 일대에는 산성이 위치해 있는 고성리의 지명과 더불어 산성의 북쪽에 있는 ‘산성교’, 성 아래 마을인 ‘성밑’, ‘성저동’, ‘성안’ 등 산성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전한다.

[건립경위]

고산성에 관한 문헌 자료를 보면, 지금의 울진읍내에 있었던 고읍성이 왜구의 침입으로 불타버리자, 한성판윤 장순열(張巡烈)의 상소로 외적의 방어상 알맞은 고산성으로 옮겨 석축을 쌓아 성을 이루니, 주위가 2,566척이고 높이가 9척이었다고 한다.

능허사(凌虛寺)를 관사로 개수하고 군민을 다스려 오던 중 1528년(중종 23)에 전 경흥부사 장백손(張伯孫)이 다시 상소하여 고산성은 도로가 험난하고 성지의 경사가 심하며 음료가 부족하여 유사시에는 장구한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하여, 1529년 현령 권박(權博)이 고읍성 옥숙동으로 다시 옮겼다.

1556년(명종 11)에 관찰사 윤인노(尹仁怒)와 현령 이언화(李彦華)가 상의하여 방어상 고산성이 최적지라 하여 영동 8읍 연군(煙軍)을 출역하여 다시 산성을 수축하고 옮겼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에 성이 함락되고 불타버렸다. 1621년(광해군 13)에 유림 남홍(南鴻) 등이 이곳은 지대가 좁고 식수가 부족하여 방어지로 적합하지 않다고 상소하여 현령 이웅남(李雄男)이 민원(民願)이라 하여 또 다시 옥숙동에 환읍하였다. 1679년(숙종 5)에 옥계동 현 군청소재지로 다시 옮겼다.

[위치]

울진읍 소재지에서 남대천을 따라 북쪽으로 약 1.5㎞ 정도 가다가 산성교를 지나 불목이골로 접어들면 해발 100m 정도의 산정에 마름모꼴의 산 능선이 연결되어 있고, 그 안으로 다소 평탄한 대지를 갖춘 곳에 다다르게 된다. 성 안에는 2채의 민가[고성2리 248번지[명도1길 57-56]], 모양재(慕陽齋), 도통사(道統祠)가 있다. 농가에는 주재로[남, 64세]의 일가가 살고 있다.

모양재는 약 64년 전에 건립된 팔작기와의 재실로 3년 전에 개와(改瓦)하였다. 재실 옆에 건립된 사당은 맞배기와로 3년 전에 건립되었다. 예전에는 성밑마을에서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으나, 1992년쯤에 북쪽에서 산성 안으로 진입할 수 있는 포장 도로가 개설되었다. 그로 인해 북쪽 성벽의 일부가 훼손되었다.

[형태]

고산성은 현존 길이가 약 1,150m이고, 망실부가 50m이며, 성 안의 면적은 약 3만평이다. 서문지 1개소와 북문지와 남문지로 추정되는 문지 2개소가 조사되었으며, 망루지 1개소, 장대 1개소, 치성 1개소가 있다.

성의 평면 형태는 자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해발 136.4m, 90.2m, 92.8m의 3개의 봉우리를 감싸 안고 있는 다각형의 형태이다. 서쪽으로는 남대천(南大川)에 연접해 있기 때문에 방어하기에 유리하다. 남쪽은 2개의 능선이 마주하여 모여 들어와 凹형을 이루고 있는 형상으로 성밑마을로 연결되게 트여 있다.

성 안은 평탄하고 아늑하여 입보항쟁(入堡抗爭)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 갖춰져 있다. 성 안에는 주민에 말에 의하면 우물이 3곳 있었다고 하나, 2곳은 매몰되었으며, 현재는 농가에서 북동쪽에 위치한 재실 입구에 1곳만이 남아 있다. 우물은 내직경 87㎝, 외직경 130㎝로 석축이며, 수출구(水出口)는 서쪽이다. 수심은 현재 90㎝로 수량도 풍부하고 맑아 현재 성 안의 농민이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국도 7호선 도로변에서 명도리 개나무재마을로 가기 전 서쪽으로 개설된 소로를 따라 약 400m 진행하면 좌우로 능선이 절단된 입구가 나온다. 이 좌우로 절개된 능선은 고산성 성벽의 일부이다. 이 능선을 넘어 들어가면 2채의 농가가 있는 마당에 들어서게 된다.

서문지(西門址)는 성 안의 농가에서 경작지를 가로질러 남서쪽으로 약 250m 떨어진 지점인 비교적 큰 석재가 있는 곳에 위치한다. 서문의 좌우로는 큰 장대석을 쌓아 입구를 튼튼히 하였다. 성의 폭은 235㎝이며, 통로의 길이는 820㎝이다. 상부는 대부분 무너져 있으나 문지 주위답게 다소 큰 석재를 이용하였다. 장대석 하나의 크기는 140×90×35㎝이며, 일반 석재의 크기는 중석이 평균 25×21㎝이고, 대석이 평균 40×35㎝이다.

서문지에서 남쪽으로 연접하여 석축 성벽 일부가 잘 남아 있다. 일부 구간은 내탁법(內託法)이나 협축법(夾築法)으로 축조된 것이 확인된다. 현존하는 성벽은 약 11단 정도이고, 바깥 높이는 4m이며, 할석을 이용하여 흩은층쌓기로 수직에 가깝게 축조되었다. 성벽 상면의 폭은 700㎝이고, 성 안쪽으로는 약 360㎝의 높이가 남아 있으며, 그 안쪽으로는 경작에 의해 성벽 일부가 묻혀 있다.

성벽은 서문지에서 남쪽으로 곧게 뻗은 능선을 따라 계속 연이어져 있다. 성벽의 서쪽은 남대천과 접하여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서문지에서 해발 92.8m의 지점을 향해 곧게 뻗어 올라가는 석성의 총길이는 110m이다. 이 구간의 성벽은 대부분 협축법으로 축조되었으며, 성벽 상면의 평균 폭은 800㎝ 전후이다. 성벽 상면을 평탄하게 하여 회곽도를 겸하고 있어 별도의 내부 회곽도는 마련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성벽은 90°를 꺾어 동쪽을 향해 산세를 따라 하강하며 경사를 따라 축조되어 있다. 제일 낮은 곳까지의 길이는 약 56m이며, 성벽은 편축법(片築法)을 이용하였다. 이곳은 성밑마을과 성안을 연결하는 출입로의 개설로 인해 성벽이 없는 구간이며, 성안에서 제일 낮은 쪽이다. 따라서 산세의 형태가 凹형을 하고 있어 출입이 용이하고, 좌우로 높게 올라가는 능선 척추부를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성문이 형성되어 있다. 당시 주 통로는 이곳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곳은 이미 오래 전에 포장된 농로가 개설되어 출입이 잦아 문지는 남아 있지 않다.

주 통로의 성벽 단절부, 즉 추정 남문지를 지나 다시 오른쪽 능선을 향해 가파르게 올라가면 50여 m 구간은 성벽이 망실되어 겨우 그 흔적만 남아 있고, 그 다음 구간은 협축법과 토석 혼축의 내탁법이 남아 있다. 성벽의 상면 폭은 약 300㎝ 정도이며, 일부 구간은 200㎝ 정도로 좁은 곳도 있다. 성벽의 바깥은 약 350㎝이며, 성 안쪽으로는 폭 1~2m의 회곽도를 마련해 놓은 듯하다.

성돌의 크기는 대석은 평균 50×10㎝이며, 중석은 평균 22×20㎝ 정도이다. 성돌은 10여 단 남아 있으며, 잘 다듬지 않은 산석으로 흩은층쌓기를 하였다.凹형의 출입구에서 동쪽을 향해 능선의 지세를 따라 올라온 구간의 총길이는 240m 정도이다.

이곳에서 다시 성벽은 90°로 꺾여 북쪽을 향해 치닫고 있다. 꺾인 점에는 성 밖으로 돌출된 잡석 토단이 있다. 이 잡석단은 동쪽을 경계하기 위한 망루로 추정된다. 직경 790㎝, 높이 약 1m의 반원형으로 상면에는 와편이 노출되어 있어 단칸 규모의 건물이 건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성벽은 제1망루에서 다시 90°로 꺾여 북쪽을 향해 뻗어 있다. 고산성에서 제일 높은 정상부인 해발 136.4m 고지를 향해 축조되어 있다. 이 구간의 길이는 약 147m 정도이며, 내탁법의 성벽이 연결되어 있다. 정상부에는 북동을 향해 성벽에서 돌출된 제2망루가 있다.

망루는 반원형으로 직경 540㎝이며, 높이는 약 1m 정도만 남아 있다. 망루단은 잡석으로 흩은층쌓기로 축조하였으며, 중간 정도의 성돌은 40×25㎝이며, 큰 성돌은 50×30㎝ 정도이다. 상층에는 제1망루에서와 같이 와편이 산재해 있어 별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제2망루에서 서쪽으로 5m 떨어진 지점에는 갈대에 묻혀 있는 방형의 잡석단이 주목된다. 한변 길이 990㎝, 현재 높이 100㎝이다. 수풀에 묻혀 더 이상의 성격은 파악할 수 없으나, 상층에서 다수의 와편이 출토되고 있어 본 망루와 관련 있는 방형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사료에 전하는 북장대(北將臺)와 능허대(凌虛臺)의 유지(遺址)로 추정된다.

제2망루에서 서쪽으로 연결된 약 185m 길이의 성벽은 성 안에서 내탁한 편축법으로 축조되었다. 성벽의 유실이 심한 편이다. 구간의 끝 지점은 성 안으로 들어오기 위한 포장 농로의 개설로 인해 성벽의 일부가 잘라졌다. 길 건너 서쪽으로 약 30m 떨어진 지점에는 성 밖으로 돌출된 반원상의 구조물이 있다. 이는 높은 곡각점에 설치된 제1망루, 제2망루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일종의 치(雉)로 판단된다.

성 안으로 들어오는 길, 즉 절단된 성벽에서부터는 약간 오르막의 능선을 따라 해발 90.2m까지 편축법의 성체가 일부는 무너지고 일부는 수풀에 덮여 약 247m 계속된다. 이후 능선의 일부는 마치 긴 자루를 달고 있는 것처럼 서쪽으로 길게 뻗어나가고 있다.

이 구간은 본성에 연이어진 치성(雉城)으로 전투시 본성으로 기어 올라오는 적들을 쉽게 발견하고, 공격하기에 좋은 지형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벽이다. 치성은 이렇듯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본성을 안전하게 지킴과 동시에 그 끝단은 전초기지로서 망루의 역할도 겸하였다. 해발 75.7m 지점에 다다르면 본성의 서벽은 물론이고 남대천 일대와 고성리, 명도리 일대를 모두 조망할 수 있다. 치성의 총길이는 약 65m이며, 상면의 폭은 680㎝이다.

치성을 돌아 성체는 다시 서쪽 성벽과 합쳐져 남쪽을 향해 곧게 내려온다. 여기서부터는 치성과 본성이 합쳐지는 점에서부터 약 40m 거리에 시발점인 서문지에 다다르게 된다.

[현황]

고산성 안의 서문지 주위에는 다수의 와편이 산재해 있다. 서문지 상부로 문루(門樓)를 얹었거나 성문을 지키는 간단한 초소용 건물지가 주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와편은 시대를 알 수 없는 민무늬의 종류들이기 때문에 그 제작 시기를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전의 와편들은 발견되고 있지 않아 1597년(선조 30) 이후의 와류로 판단된다.

성 안에는 오랜 경작에 의해 별도의 건물지 유구가 지표에 노출되어 있지는 않으나, 다수의 와편이 채집되고 있어 주요 건물지가 지하에 남아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성 안에서는 삼국시대의 토기편 일부도 채집되고 있어 산성으로 이용되기 전부터 생활했던 원주민들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