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4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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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城郭 |
영어의미역 | Fortres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이희돈 |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에 있는 외침에 대비하여 흙과 돌로 구축한 방어 시설.
[개설]
우리나라는 전체 면적의 약 70%가 산지로 되어 있어 일정 지역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옛부터 자연적·인공적 외침에 대비하며, 스스로의 거주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인공적인 구조물을 축조해왔다. 성곽은 군사적·행정적인 집단이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거주하면서 공동 활동을 할 수 있는 일정한 공간을 확보하고 그 구조물이 연결성을 갖는 전통 건조물이다.
성곽의 발전은 곧 국가 발전의 척도로 간주될 만큼 고대국가 이래 상호적으로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한반도에 성곽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성곽은 지금의 평양성(平壤城)으로 추정되는 위씨조선(衛氏朝鮮)의 왕검성(王儉城)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삼국의 축성은 시기적으로는 서로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3~4세기경에 이르러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 지배의 체계가 갖춰지면서 군사적·행정적인 제도의 확립과 함께 진행되었다. 삼국은 국력을 기울여 도성(都城)을 구축하였으며, 인접 국가와의 사이에서 발생되는 영토 분쟁에 대비하여 변방에 산성을 축조하면서 성곽이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시대 태조는 한양에 도성을 축조하기 위해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한 후 1396년(태조 5)에 백성들을 징발하여 축성을 완료하였다. 당시의 도성은 주로 토성(土城)이었으나, 숙종·영조·정조 연간에 이르러서는 대부분 석성(石城)으로 개축되었다. 개축한 석성은 둘레 약 17㎞, 높이 40척 정도 되었으며, 4대문과 4간문을 두었다.
한편 세종과 성종 때에는 읍성(邑城)의 축조가 활발하였다. 과거 토축이었던 것을 석축으로 개축하여 방어력을 높이고, 규모가 작은 것은 크기를 늘렸다.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읍성은 세종과 성종 때에 축조된 것이 많다.
[현황]
울진군의 성곽은 축성 목적에 따라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거주 주체가 군현 주민의 보호와 행정적·군사적인 기능을 함께 수행하기 위해 축성된 경우로 읍성(邑城)이 대표적이다. 다른 하나는 순전히 군사적인 목적으로 축성된 경우로 산성(山城)이 이에 해당된다.
연해 지대는 외침의 일차적 방어지이므로 불시에 효율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평지가 아닌 넓은 구릉을 이용한 성곽을 많이 축조하였다. 울진군의 경우도 읍성을 여러 번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입지는 모두 방어가 용이한 높은 언덕을 이용하였다. 읍성은 죽변성·장산성·산내성·고현성·고읍성·고산성·평해읍성·기성읍성 등이 있으며, 산성은 성산성·고모산성·백암산성·왕피성·안일왕성 등이 있다.
또한 울진군에는 수군 주둔지로서 포진 또는 포영이 2개소가 있다. 근남면 수산리의 울진포진과 평해읍 월송리의 월송만호진이 있다. 포진은 주로 해안에 설치하여 해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수군의 진지(陣地)로 왜구를 해안선에서 막아 피해를 줄이고 백성을 보호하려는 적극적인 방어책에서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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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울진군 성지 유적 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