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5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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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軸 |
영어음역 | An Chuk |
이칭/별칭 | 당지(當之),근재(謹齋),문정(文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최인표 |
[정의]
고려 후기 경상북도 울진 지역을 소재로 시와 기문을 남긴 문신.
[가계]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증조할아버지는 호장 안득재(安得財)이고, 할아버지는 호장 안희서(安希諝)이다. 아버지는 봉익대부밀직제학에 추증된 안석(安碩)이고, 어머니는 검교군기감 안성기(安成器)의 딸이다. 부인은 검교군기감 문구(文龜)의 딸이다.
[활동사항]
1299년(충렬왕 25) 성균관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1307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금주사록(金州司錄)·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수찬(修撰)·사헌규정(司憲糾正)을 역임하고, 1324년(충숙왕 11) 원나라 과거에 제3갑으로 뽑혀 요양로개주판관(遙陽路盖州判官)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로 돌아와 성균악정(成均樂正)·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강원도존무사(江原道存撫使)로 파견되었다. 1332년(충숙왕 복위 1) 판전교지전법사(判典校知典法事)에서 파면되었다가 전법판서(典法判書)로 복직되었으나, 내시의 미움을 받아 다시 파직되었다. 충혜왕이 복위하자 다시 전법판서·감찰대부(監察大夫) 등에 등용되고, 1343년(충혜왕 복위 4) 검교평리(檢校評理)로 상주목사가 되었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승진하고 이듬해에 첨의평리(僉議評理)를 겸하였다.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역임하면서 민지(閔漬)가 지은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이제현(李齊賢) 등과 개찬하였고, 또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347년 판정치도감사(判整治都監事)가 되어 양전(量田) 행정에 참여하였다. 이 해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으나 집사자(執事者)가 유교를 기뻐하지 않아 파직되었다가 이 해 겨울에 복직되었다. 1348년 봄에 병으로 사직을 청하였으며 여름에 다시 흥녕군에 봉해져 품계가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이 해 향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경상북도 풍기 지역의 중소 지주적 성격을 지닌 신흥 사대부 출신의 안축은 생활이 검소·질박하고 근면·성실하였다. 이러한 그의 성격은 현실 관리로서 민중에 대한 한없는 애정으로 나타났다. 이 점은 이제현이 안축의 시집 『관동와주(關東瓦注)』 서문에서, 감격하고 분개하여 지은 작품이라 했으며, “관동 지방 풍속의 이해득실과 백성들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나눈 시가 열에 아홉이나 된다”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저술 및 작품]
저서에 『근재집(謹齋集)』과 『관동와주』가 있다. 경기체가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으로 문명이 높았다. 이 밖에 「월송정(越松亭)」·「취운정(翠雲亭)」·「망사정(望槎亭)」·「인빈각(寅賓閣)」·「취운루(翠雲樓)」 등 울진과 관련된 시와 기문을 남겼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 대덕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에 ‘고려삼중대광도첨의찬성사근재안축선생유적비(高麗三重大匡都僉議贊成事謹齋安軸先生遺蹟碑)’가 있다. 1544년 경상북도 영주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소수서원]과 1643년 경기도 장단군 봉잠서원(鳳岑書院)에 배향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