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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0604
한자 尹時衡
영어음역 Yun Sihyeong
이칭/별칭 평중(平仲),우암(憂菴)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금매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인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금매리
성별
생년 1602년연표보기
몰년 1663년연표보기
본관 파평(坡平)
대표관직 생원

[정의]

조선 중기 경상북도 울진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평중(平仲), 호는 우암(憂菴). 증조할아버지는 종사랑(從仕郞) 윤여호(尹汝好)이고, 할아버지는 승사랑(承仕郞) 윤희성(尹希聖)이다. 아버지는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 윤몽열(尹夢說)이고, 어머니는 삼척김씨(三陟金氏)로 김흥시(金興時)의 딸이다. 부인은 한양조씨(漢陽趙氏)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 조임(趙任)의 딸이다.

[활동사항]

어릴 때부터 문장을 잘 지어, 16세 때 지은 「봉왕부(蜂王賦)」는 당시 고을 선비들을 놀라게 하였고, 백일장에 여러 번 장원하여 동료 선비들 간에 명망이 높았다. 만휴(萬休) 임유후(任有後), 이우당(二友堂) 주개신(朱介臣) 등과는 학문을 토론하고 생사를 같이하는 막역한 벗이었다. 잠시 처가인 영양에 머물 때에는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 등과 글로 사귄 벗으로 영동·영서 지방에 널리 알려졌다.

1647년 사마시에 급제하여 생원이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할 때 「강심경부(江心鏡賦)」를 지어 장원하여 장관의 칭찬을 받았다. 행동이 법도를 어김이 없어 모든 유생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성품이 온후하고 학문과 덕행을 겸비한 학자로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위중한 어머니의 병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이고 정성으로 간호하여 구하였으며, 형제간에 우애 있고 족친 간에 화목하게 지내어 많은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1656년(효종 7) 삼남 지방에서 8년 동안 한발로 흉년이 계속되자 효종은 민간 선비들에게 정치에 대한 의견을 구하는 교서를 내렸다. 이에 윤시형은 백성들의 고통을 조목조목 지적하여 정책 대안 수천 말을 작성하여 올렸다. 효종은 비지(批旨)를 내리는 동시에 그 상소문을 출판하고 팔도에 배포하여 널리 알렸다. 1663년 향년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독서를 좋아하였으며, 특히 『중용』과 『주역』을 공부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금매리 몽천에서 많은 유생들을 모아 강독하고, 가르치기에 힘써 문하에서 공부하여 성취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저술 및 작품]

『우암선생문집(憂菴先生文集)』 3권이 전한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말터마을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93년 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금매리 몽천에 몽천사(蒙泉祠)를 세워 위패를 모시고 향사하였다. 1794년 몽천사가 몽천서원(蒙泉書院)으로 승격되었고, 1858년부터 관청의 제물로 제사 지냈다. 1868년 서원 철폐령으로 몽천서원이 철폐되자 옆에 있던 삼조어비각(三朝御批閣)우암 윤시형, 삼족당(三足堂) 윤여룡(尹如龍), 황림(篁林) 윤사진(尹思進)을 배향하였다. 현재는 몽천당을 세우고 음력 3월 22일에 모여 제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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