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6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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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蒙腹抵抗運動 |
영어의미역 | Struggleing aginst Japanese Uniform in 1911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장희흥 |
성격 | 항일운동|저항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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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11년 7월 |
종결연도/일시 | 1911년 7월 |
발생(시작) 장소 | 소행재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정림리]|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고성리 가원동 |
관련인물/단체 | 남대연|남진영|노헌구|유영설 |
[정의]
1911년 경상북도 울진에서 일제가 강요한 상복[蒙服] 입기를 거부하여 일어난 저항운동.
[역사적 배경]
일제는 1910년 국권 강탈 후 무단 통치를 펼쳐 한국인을 탄압하고 일본의 의식과 풍습을 강요하였다. 1911년 7월 일본의 메이지[明治] 왕이 죽자 울진의 헌병 분대장 구야감(久也勘)이 몽복을 강요하므로 남대연(南大秊), 남진영(南軫永) 등 유생들이 이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하여 저항운동을 벌였다.
[경과]
울진 헌병 분대장 구야감은 울진읍 정림리 소행재(素行齋)와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도들이 공부하는 강학소로 찾아와 흑포상(黑布喪) 완장을 주면서 몽복을 강요하였다. 이에 강학소의 남대연, 남진영, 노헌구(盧憲九), 유영설(劉永渫) 등은 불의(不義)의 복(服)이라면서 완강히 거절하였다.
헌병 분대장은 “합병이 된 금일에 그대들은 어느 나라의 백성이냐?”라고 뭍자 유영설이 곧 대답하기를 “우리는 선왕(先王)의 유민(遺民)이다.”라고 하였다. 헌병 분대장은 후일 다시 호출할 것이라 말하고 돌아갔다.
[결과]
헌병 분대장은 보조원 천씨로 하여금 무실(務實) 남진영을 연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남진영은 고성리 가원동(佳原洞)에서 동행을 거절하며 말하기를 “너는 전날에 내가 죽을지언정 갈 수 없다는 말을 잊었느냐.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되게 할 수는 없다. 지금 또 와서 욕을 보이는 것은 죽이겠다는 뜻인데, 나는 망국의 일통유민(一筒遺民)으로 구차하게 살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선철(先哲)의 사자첩(死字帖)을 항상 머리 위에 두고 있으니 내 뜻을 그대로 보고하라.” 하고는 귀가하였다.
[의의와 평가]
일제의 국권 강탈 후 일본의 풍습을 강요한 것에 저항하여 죽을 각오하고 조선의 정신을 지키려 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