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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0628
한자 日帝强占期
영어의미역 Japanese Colonial Period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희흥

[정의]

1910부터 1945년까지 경상북도 울진군의 역사.

[행정구역의 변화]

1910년 8월 22일 이른바 「한국병합(韓國倂合)에 관한 조약(條約)」을 강제 조인한 일제는 일주일 후인 8월 29일 이를 공포함으로써 식민 통치를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9월 30일자로 조선총독부 관제와 조선총독부 중추원 관제 등 통치 기구에 관한 일련의 관제와 동시에 칙령 제357호로 조선총독부 지방관 관제를 공포하면서 지방 통치 기구를 확립하였다. 국권 강탈 직후 울진군과 평해군의 면리제(面里制)는 조선 후기 울진과 평해에 시행된 면리제와 국권 강탈 직후의 지방제를 대비해 보면 그 모습이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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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일제강점기 울진군의 촌·동·리명 변화

한말 울진과 평해의 군면명(郡面名)과 동리명(洞里名) 및 촌리명(村里名)을 잘 보여주는 『관동읍지』에 나오는 면명(面名)이 국권 강탈 직후인 1912년에 나온 『구한국 지방행정구역 명칭 일람』에서는 약간 달리 나오고 있다. 울진군의 경우 종래 현이었던 읍격이 1895년 갑오개혁의 시행에서 군으로 바뀌면서 면명도 하현내면과 상현내면이 하군면과 상군면으로 바뀌었다. 평해의 경우는 전자에서의 하리면이 후자에서는 북하리면과 남하리면으로 나누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울진군의 경우 전자에서는 주로 촌리명으로 되어 있었으나 후자의 경우에서는 전자의 촌리명이 동명(洞名)으로 바뀌는 동시에 동명(洞名)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평해군의 경우는 전자에서 리명(里名)이 후자에서도 리명으로 나오고 있지만 리의 수가 전자에 비해 많이 늘어나고 있다. 이는 자연촌이나 지역촌이 서서히 성장하여 행정촌으로 바뀌면서 분화된 결과의 산물임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국권 강탈 후 3년 정도 지나서 통치 기반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자 조선총독부는 1913년 10월에서 1914년 4월에 걸쳐 대대적인 지방제 개혁을 단행하고, 1913년 12월 29일 부령 제111호를 공포하고, 1914년 3월 1일과 4월 1일부터 일제히 시행에 들어갔다.

1914년의 군면(郡面) 개편은 이후 도시 행정구역의 확장으로 도시 주변의 군면 구역에 약간의 변화가 수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지방 행정구역의 토대로서 이어져 오고 있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시 대폭적인 통폐합의 결과 220개의 군명이 남게 되었다. 강원도에서 없어진 군 가운데 8개 면이었던 평해군은 울진군의 8면으로 통폐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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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신구대조 부군면리동 명칭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1914년 지방제의 개정 이전까지 울진군과 평해군이라는 별개의 행정 단위로 존재하던 두 지역이 1914년 지방제의 개정으로 울진군이라는 하나의 지역으로 통합되었다는 사실이다. 평해군이 울진군에 통합되면서 평해군의 면들이 몇 개의 면으로 통폐합되어 울진군에 편입되었다.

평해군의 상리면·북하리면·남하리면·남면이 평해면, 근서면·원서면이 온정면, 근북면·원북면이 기성면으로 통합되어 울진군의 면으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울진군도 상군면·하군면·근북면이 삼화면으로 통합되었고, 원북면이 북면으로 개명되었다. 그와 함께 이전의 동리(洞里)들이 일부 재편되면서 이전의 동명들이 모두 리명(里名)으로 바뀌는 중요한 계기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울진군은 종래 울진과 평해가 울진군이라는 읍격을 지닌 하나의 행정 단위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총독부는 1917년 6월 9일자 칙령 제1호 「면제(面制)」와 총독부령 제34호 「면제시행규칙(面制施行規則)」으로 면제를 실시할 것을 공포하고, 7월 11일자 총독부령 제37호 「면제시행기일(面制施行期日)」에서 10월 1일부터 면제를 시행한다고 공포하였다. 면제를 실시하고 면에 공공사무의 처리를 위임한 것은 토지조사사업의 수행과정에서 면장(面長)과 면리원(面吏員)의 식민정책 하수인으로서의 능력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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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방 전후 면리명 대조

1914년에 개정된 면리명(面里名)은 삼화면(三和面)이 울진면으로 개명되는 등 극히 일부 바뀌어진 것을 제외하면 1970년대의 면리명과 거의 대동소이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1914년 지방제의 개정인 군면 개편은 행정 단위의 승강에 따른 동리의 구역과 명칭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울진군 행정 단위의 토대로서 이어져 오고 있을 정도로 중요한 계기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강원도는 21개 군이었고, 고성군(高城郡)·금성군(金城郡)·평해군(平海郡)·안협군(安峽郡)이 통폐합으로 없어졌다.

[항일운동]

1. 무단통치하 항일운동

한말 치열하게 전개되던 의병전쟁은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에 이은 국권 강탈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됨에 따라 만주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국내에서의 큰 무력 항쟁은 거의 없었다. 특히 일제는 신민회(新民會) 사건 이후 모든 집회와 결사를 금지시키는 조처를 취하였다.

해외로 망명한 항일 독립운동가들은 간도·연해주 등지에서 독립 운동 기지를 개척하고 민족의 독립 역량을 축적해 나갔다. 국내에서는 1915년까지 비록 규모는 작으나 전국적으로 산발적인 의병 전쟁이 전개되었고, 신민회 사건을 계기로 항일운동은 비밀 지하 운동의 형태로 추진되고 있었다.

당시 울진 지역에서도 가시적이고 직접적인 무력 독립 항쟁은 전개될 수 없었다. 1912년 울진헌병대장 일본인 구야라는 자가 죽변에 와서 지방 유지를 모아 놓고 한일합방 소감을 묻자 죽포(竹圃) 전영직(田永稷)은 나라 잃은 설움을 강변하였다는 데서 울진 사람들의 항일정신을 엿볼 수 있다.

2. 3·1독립만세운동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3·1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울진에서는 옛날 만흥학교 출신과 한학계 청년 인사들이 매화시장에서 음력 3월 11일을 기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비밀회의를 하였다. 남과 북을 연결하기 위하여 매화시장·읍내시장·흥부시장까지 행동할 계획으로 북면 고목리 전병겸(田炳謙)과 울진읍 구만리 주진휴(朱鎭烋)는 전날부터 매화시장 시위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일본 헌병의 방해로 장날 낮에 전병겸(田炳謙)·최효대(崔孝大) 등과 「독립선언문」을 전달한 장식(張植)은 거사 3일 전에 일본 헌병에게 예비 검속되었다. 12일 울진장에서 계획했던 행사는 울진 감리교회 측의 준비 부족으로 중지되었고, 13일의 흥부장날 시위 규모는 대단히 컸다고 한다. 이날 전병항(田炳恒)·남병표(南炳豹)의 주동으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애국동지들은 매화와 부구에서 많이 체포되었으며 부산과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 외에도 서울에서 참가한 최익한(崔益翰)과 황상봉(黃相奉)·최진순(崔瑨淳)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 외 많은 울진 출신들이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수감되었다.

3. 신간회 운동

1927년 서울에서 조직된 신간회(新幹會)는 국내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의 구체적인 좌우합작적(左右合作的) 모임이었다. 민족자주독립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먼저 국내외에 지회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울진 지역에서도 홍기문(洪起文)을 중앙에 파견하여 신간회 울진지부 조직을 담당하게 하였다.

위원장에 황만영(黃萬英)을 선출하고, 장식(張植)·주우영(朱愚營)·주진복(朱鎭福)·황탁용(黃鐸龍)·남왈성(南曰星)·주병복(朱炳福)·전광표(田光俵)·김병호(金炳虎)·전병창(田炳昌) 등을 간부로 하여 신간회 울진군지부를 조직하여 바깥사업[外廊事業]으로 각 리·동에 야학회(夜學會)와 독서회(讀書會)를 만들고 생활과 의식구조를 개선하였으며, 안으로는 국외 혁명단체와 연락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신간회는 창립 당시부터 좌우익간의 갈등·대립으로 분란을 계속하다가, 좌익진영이 우익진영에 기선을 제압당하자 부산지회를 통하여 해소론을 제기하였다. 따라서 1931년 5월 16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해산을 결의하였다.

4. 민족해방운동

1930년대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제는 파쇼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조선을 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화하는 동시에 민족말살정책을 강제로 시행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 국외에서의 활발한 민족해방운동을 수행하던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두 계열 모두의 활동은 점차 무장투쟁으로 귀결되고 있었던 반면에 국내에서는 학생비밀결사를 중심으로 여타 비밀결사가 조직되어 활동한 이외에 별 다른 항일운동세력이 존재하기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이 시기 울진 지역에서도 형평운동(衡平運動) 이외의 민족해방운동으로는 울진공작당 및 적색농민조합운동과 비밀결사운동의 형태인 조선독립공작단(朝鮮獨立工作團) 및 창유계(暢幽契) 사건 등과 같은 민족해방운동만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조선독립공작단 사건은 1931년 만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만주에 만주국이란 괴뢰정권을 수립하고 만주에 거주하던 조선 독립투사들을 만주로부터 축출된 울진 지역 사람들의 대부분은 사동 만흥학교 출신으로 윤인보·남재수·안규원·황병문·김기풍 등이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고초 끝에 14명이 기소되었다.

형평운동은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白丁)들의 신분해방운동이었다. 울진 지역에서도 청년회와 형평사 동맹원(同盟員)의 응원을 받으며 같은 해[1923년] 11월에 울진청년회관에서 울진형평사(蔚珍衡平社)가 결성되었다. 사장에 최정일(崔廷日), 서기 김병두(金炳斗) 외 5명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다른 사회운동단체와 같이 해체되고 말았다. 형평운동은 백정들의 자기해방운동인 동시에 일제식민지 치하에 있어서 다른 사회운동단체와의 제휴 아래 민족해방운동의 일익도 담당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울진 지역은 한말 의병운동과 이후 해외독립기지 건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곳이다. 1910년 이후 항일정신은 그대로 이어졌고, 이것은 3·1운동과 민족교육운동, 신간회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후 사회주의 계열의 울진공작단이나 적색농민조합운동 등으로 연결된다. 또한 비밀결사운동의 형태인 조선독립공작단 및 창유계 사건 등과 같은 민족해방운동이 전승되는 항일의 고장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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