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7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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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永育 |
영어음역 | Han Yeongyuk |
이칭/별칭 | 백헌(白軒)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소태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전인식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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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소태리 |
성별 | 남 |
생년 | 1878년 7월 16일 |
몰년 | 1935년 11월 1일 |
본관 | 청주(淸州) |
대표경력 | 덕릉참봉(德陵參奉)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울진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백헌(白軒). 청주한씨 시조인 한난(韓蘭)의 31대손이고, 울진 입향조 한위(韓緯)의 15대손이다. 할아버지는 한재린(韓在麟)이며, 아버지는 한필석(韓弼錫)이다.
[활동사항]
덕릉참봉(德陵參奉)을 지냈다.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전국에서 의병 운동이 일어나자 1906년 3월 6일 영해에서 의병을 일으킨 신돌석(申乭石) 부대에 들어갔다. 도선봉장(都先鋒將)이 되어 백암산(白巖山)과 일월산(日月山)에 본영을 두고 300여 명의 동지들과 영양·영덕·영해·평해·울진 등지에서 3년에 걸쳐 일본군과 싸웠으며, 군량미가 모자라면 집안과 문중의 전답을 팔아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어 주었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자 고을의 동지들을 모아 그 해 3월 16일 영해 장날 시장에서 수천의 군중과 합류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고, 일본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여 기물 등을 파괴하고 공문서를 모조리 불태웠다.
만세 시위를 진압하고자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 군중에게 무자비하게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이때 한영육도 오른팔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혹독한 옥살이에서 얻은 병이 깊어 1935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1992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온정면 소태리 산개사당곡(山介士堂谷) 선영에 ‘애국지사한공영육비(愛國志士韓公永育碑)’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