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0634
한자 三一運動
영어의미역 Independence Movement in 1919
이칭/별칭 기미독립운동,기미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장희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항일운동|독립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19년 4월 10일연표보기|1919년 4월 13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19년 4월 11일연표보기|1919년 4월 13일연표보기
발생(시작) 장소 울진 매화장터[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매화리]지도보기|울진 흥부(興富)장터[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부구리]지도보기
관련인물/단체 전병겸|최효대|남재량|윤정규|윤병관|최중모|윤학규|남광호|장형관|윤상흥|윤강규|전병항|남병표|김일수|황종석|홍우현|김기영|김도생|박양래|김봉석|김재수|이상구|만흥학교

[정의]

1919년 경상북도 울진에서 윤병관, 장식 등이 주도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개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의주·원산 등지에서 독립선언식이 이루어짐으로써 전국적인 민족독립운동이 전개되자, 울진에서도 그 영향을 받아 1919년 4월 경상북도 울진군 원남면[현 매화면] 매화리 매화장터북면 부구리 흥부(興富)장터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역사적 배경]

일본제국주의는 1910년 국권을 강탈한 뒤 폭압적인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한민족은 무단 통치 아래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박탈당하였고, 민족교육과 종교도 탄압받았다. 한편 회사령으로 민족자본가의 성장이 막히고, 토지 조사 사업으로 많은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였으며, 도시의 노동자 또한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크게 차별을 받았다.

그 결과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거세어져 갔고, 다양한 형태의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이 일어났으며, 국내에서는 비밀 결사 운동, 교육 문화 운동, 생존권 수호 투쟁 등을 통해 역량을 키워 나갔다.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식민지 처리 과정에서 식민지 국가에 민족자결주의를 적용하자고 주창했다. 이 주장은 식민지 약소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을 불러일으켰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탑골공원에서는 군중들이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 대열을 이루었다. 시위의 맹렬한 불길은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번져 나가, 울진에서도 만흥학교(晩興學校) 학생들과 유림계 청장년들이 모여 독립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극비리에 결의하였다.

[목적]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의 영향을 받아 울진에서도 민중의 독립 의지를 알리고자 매화리부구리 장날에 만세 운동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

[발단]

장식(張植)이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 운동에 참가한 학교 선배 정재용(鄭在鎔)과 동향인 황상봉(黃尙鳳)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였다. 고향으로 내려온 장식은 친구 윤병관(尹炳寬)에게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전달하였다. 윤병관은 윤강규(尹康逵)[일명 鎬逵], 남광호(南光鎬), 최중모(崔重模), 윤정규(尹定奎), 최현탁 등을 비밀리에 집으로 불러 거사를 논의하였다.

다음날 윤병관은 고성리 주진휴(朱鎭烋)와 고목리 전병겸(田炳謙)에게 연락하여 매화 장날과 부구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 시위를 일으킬 것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주진휴는 울진읍 감리교회 목사 이동식(李東湜), 전도사 황병호(黃炳鎬), 권사 최동순(崔東舜)과 만나 거사를 계획하던 중 일제 관헌에게 예비 검속을 당하였다.

한편, 날짜는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 만흥학교 학생이자 지장감리교회 전도사로 교회 활동을 하던 전병겸은 서울에서 감리교회 전도사로 있던 외조부 홍규익에게서도 독립선언서를 건네받았다. 이후 전병겸은 자신이 다니던 교회 신도 최동순 등을 끌어들여 거사를 계획하였다.

[경과]

울진군의 3·1운동은 매화리부구리 만세 운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매화리 만세 운동을 살펴보면, 매화리금매리 출신의 청년들과 고목리전병겸·최효대(崔孝大)·남재량(南載亮)·윤정규·최중모·윤병관·윤학규(尹學逵)·남광호·장형관(張炯觀)·윤상흥(尹相興) 등이 주도하였다. 4월 10일 밤 이들은 남수산(嵐峀山) 꼭대기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는데 밤사이 이것이 발각되어 윤상흥을 비롯한 다섯 명이 잡혀갔다. 이 일로 인해 일제 경찰은 삼엄한 경계를 폈다.

다음 날인 11일 매화장이 열리자 오후 3시경 최효대가 목면으로 만든 태극기와 ‘대한독립’ 등을 쓴 대형 깃발을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외쳤으며, 이에 장터에 모인 군중들이 합세하였다. 이 가운데 11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만세 시위는 그날 밤 금매리에서 다시 일어났는데, 이 시위는 매화리의 윤강규, 금매리의 남계원(南啓源) 등이 주도한 것이었다.

4월 13일 북면 부구리흥부장터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나 4명이 체포되었으나 만세 운동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이때 만세운동에 참여한 50여 명이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출동한 부구리 주재소 헌병 보조원을 집단 폭행하고 총을 빼앗으려 하자 헌병 보조원은 총을 쏘아 9명을 체포하고 군중을 해산시켰다.

당시의 판결문에는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경위를 “전병항(田炳恒), 남병표(南炳豹) 두 사람은 미리 만든 태극기를 동네 사람 모두 지니게 한 뒤 13일 오후 1시에 시장 중턱인 칠보산 언덕에서 태극기를 펼쳐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이에 시장에 모인 온 장꾼이 이어 외치고 성난 파도처럼 합세하여 시위행진이 전개되었다. 무장한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총을 쏘며 삼엄한 태세로 시위 군중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주동한 두 사람은 체포되어 끌려가면서도 굴하지 않고 만세를 외쳤다”라고 적고 있다.

부구리 흥부장터 만세 운동을 이끈 남병표매화장터 시위에도 참여하였고, 전병항매화장터 만세 운동 주동자의 한 사람인 전병겸의 사촌이다. 즉 흥부장터의 만세 운동은 매화장터 만세 운동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다.

이날 흥부장터 시위에 참여했던 김일수(金一壽)는 『매일신보』를 읽다가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되었고, 기회를 엿보다가 시위에 가담하였다. 황종석(黃宗錫), 홍우현(洪禹鉉), 김기영(金琪榮), 김도생(金道生), 박양래(朴揚來), 김봉석(金鳳錫), 김재수(金在壽), 이상구(李相龜), 김광수(金光壽) 등도 이날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날 시위에는 전문규(田文圭)·김경선(金敬善) 등 노인도 참여하였는데, 김경선 노인은 청년들에게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혈투하는 이때 민족으로서 방관한다”라고 꾸짖어 젊은 층이 시위운동에 참여하도록 유도하기도 하였다. 이에 김일수 등의 청년들은 칠보산에 올라 야간 시위를 계속하였고, 신화리고목리에서도 뒷산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결과]

원남면[현 매화면] 매화리북면 부구리의 만세 시위로 22명이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죄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밖에, 1919년 4월 5일 울진군수 강성희(姜星熙)가 온정면 소태리에 와서 일제에 찬동하는 강연을 하고 찬동 서약서에 날인을 받아 자전거로 평해리로 가는 도중 이화익(李和翊)소태리 일본헌병주재소 옆에서 서약서를 반환하라고 외치다 공무집행방해 및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부산형무소에서 10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기성면 봉산리에 사는 박경선(朴敬善)은 만주 서간도에 거주하면서 입수했던 독립선언서 12매를 가지고 있다가 일본 헌병에게 발각되어, 출판물 위반 및 보안법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금고 2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울진 출신으로서 다른 지역의 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한 사람들도 있다. 최익한(崔益翰), 최진순(崔瑨淳), 황상봉은 서울의 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했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온정면의 나부석(羅富碩)·한영육(韓永育), 원남면[현 매화면]의 배희직(裵喜稷)은 영해(寧海) 시위에 참가했다가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전영경(田永璟)과 황윤성(黃允成)은 각각 원산과 평양 시위에 참가했다가 그곳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문재무(文在武)·문전문(文田文) 형제는 간도 용정촌의 독립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기성면 김병두(金炳斗)는 『독립신문』 배달과 자금 모집을 했다가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웹사이트 플러그인 제거 작업으로 인하여 플래시 플러그인 기반의 도표, 도면 등의
멀티미디어 콘텐츠 서비스를 잠정 중단합니다.
표준형식으로 변환 및 서비스가 가능한 멀티미디어 데이터는 순차적으로 변환 및 제공 예정입니다.

〈표〉울진 3·1운동 실형자명단

[의의와 평가]

울진의 3·1운동은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비폭력 독립운동이다. 이후 울진 지역의 민족해방운동과 적색농민조합운동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
  • 『울진군지』(울진군지편찬위원회, 2001)
  • 사이버인권관(http://cyberhumanrights.com)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5.08 행정지명 현행화 원남면에서 매화면으로 변경 사실 반영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