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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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益翰 |
영어음역 | Choe Ikhan |
이칭/별칭 | 창해(滄海)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나곡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신상구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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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나곡리 |
성별 | 남 |
생년 | 1897년 |
본관 | 강릉(江陵)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울진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강릉(江陵). 호는 창해(滄海). 참판(參判) 수헌공(睡軒公)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소초(素樵) 최대순(崔大淳)이다.
[활동사항]
어려서 한학을 익혔으며, 1909년(순종 3) 13세 때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개최된 시회(詩會)에 참가하여 장원을 하였다. 1911년 당시 영남학파의 거두였던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탐구하였다. 1917년 곽종석의 권유로 신학문을 배우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상경하여 1년 만에 중동학교를 마치고 1918년부터 2년간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문학을 배웠다. 이때 그는 동서양의 학문을 비롯하여 민족의 현실과 세계사의 흐름에 점차 눈을 뜨게 되었던 듯하다.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공부하던 중 3·1운동을 경험한 최익한은 이후 민족운동에 뛰어들어, 영주군에서 1,600원을 모아 상하이로 보내는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 자금 모집책으로 활약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3년 만에 석방되었다.
최익한은 출옥 후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였다. 당시 일본에는 재일본 조선인 유학생 단체가 결성되어 있었고, 이 단체들 대부분은 사회주의 이념을 표방하고 있었다. 최익한은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사상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5년 1월에 재일본 조선인들로 구성된 사상 단체 일월회(一月會)에 가입하였고 이후 재일본무산청년동맹, 신흥과학연구회 등에서도 활동하였다.
1926년에는 사회주의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소련의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소련 유학이 좌절된 직후 중동학교 동창인 박락종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쳐 나갔으며, 1927년 4월 조선공산당 일본부 조직부장을 맡았다.
이후 서울과 도쿄를 왕래하면서 조선공산당과 관련된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민족협동전선 운동의 강화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조선공산당 제2차 대회에서 결정된 사상 단체 해체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글을 『이론투쟁』[1927. 4]에 기고하고, 1928년 1월 26일부터 2월 11일까지 7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조선 사회 운동의 빛」을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최익한은 1927년에 조선 사회 운동이 “이론은 추상에서 구체로, 조직은 저급에서 고급으로, 실천은 소수에서 대중으로” 나아갔고, “파벌주의 청산, 사상 단체 해체, 민족적 단일당의 결성, 신간회 지지 및 그 지회 조직” 등이 이루어져 획기적으로 진일보하였음을 강조하였다.
『조선일보』에 위 글을 발표한 1928년 2월, 일제의 조선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행해졌다. 최익한은 도쿄에서 체포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7월 대전형무소로 이감 도중 대전역에서 “조선공산당 만세!”, “조선 민족 해방 운동 만세!”를 외치며 만세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징역 1년이 더해져 7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였다.
최익한이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1934년 2월 큰아들 최재소(崔在韶)와 둘째 아들 최학소(崔學韶)가 울진공작당 사건에 연루되어 각각 징역 2년 6월형과 3년형을 선고받았다. 3부자가 한꺼번에 옥살이를 하는 비운을 겪었던 것이다. 최익한은 그런 슬픔을 옥중에서 한시를 지어 표현하기도 하였다. 복역 중이던 1937년 3월 큰아들 최재소가 고문의 후유증과 열악한 감옥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하였다. 최학소는 1943년 3월 다시 창유계 사건으로 검거되었으나 도중에 탈옥하였다.
광복이 되자 최익한은 사회주의 운동을 재개하여 세칭 ‘장안파 공산당’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이들은 박헌영 중심의 ‘재건파 공산당’과는 운동 노선을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이 무렵 최익한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사부장,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상임위원 및 기획부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947년 12월 최익한은 민족의 분단을 막고 통일 민족 국가의 수립을 목표로 한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하였다. 이것이 그가 남한에서 펼친 마지막 활동이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북한으로 갈 때 가족을 데리고 간 것이다. 그 해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대 후반 이후로 최익한의 활동은 거의 알 수 없으며, 사망한 때도 현재로서는 명확하지 않다.
[저술 및 작품]
1937년부터 1938년 말까지 『조선일보』에 「한시 만화」·「조선어 기술 문제 좌담회」·「역대 사담」·「향토 문화를 찾아서」 등의 한문학, 역사, 향토 문화에 관한 글을 게재하였다. 그리고 1938년 말부터 1940년 8월 『동아일보』가 폐간될 때까지 「여유당전서를 독(讀)함」, 「전통 탐구의 현대적 의의」, 「추석 가배의 유래와 민속」, 「종두술과 정다산 선생」 등 국학에 관한 글을 165회 연재하였다. 또한, 「조선 과거 교육 제도사」, 「충의의 ‘도’, 유교의 ‘충’에 대하여」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광복 이후인 1947년에는 『조선 사회정책사』를 집필하였다.
북한으로 간 이후에도 최익한은 정치적 활동은 삼간 채 주로 학문 활동에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역사 제 문제』에 「3·1운동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재고찰」[1949. 5], 「조선 유교 사상에 대한 역사적 고찰(상·중)」[1949. 11~12] 등을 발표하였고, 『역사과학』에 「조선 문학사와 한문 문학」[1955]을 게재하는 등 철학과 역사에 관한 연구 활동에 힘썼다. 1955년에는 최익한의 최고 업적으로 꼽히는 『실학파와 정다산』을 집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