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17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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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關東第一樓望洋亭-越松亭 |
영어의미역 | Mangyangjeong Pavilion and Wolsong Pavilion-the Best View in Gwandong Province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사포리|평해읍 월송리 |
집필자 | 심현용 |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에 소재하는 관동팔경 중의 망양정과 월송정.
[개설]
울진은 경상북도 동쪽 최북단 해안에 위치한 지역으로 6만여 명이 사는 고장이다. 원래는 북쪽에는 울진군, 남쪽에는 평해군으로 다른 행정체제를 갖고 있던 지역이었으나, 1914년 두 군을 합쳐 지금의 울진군이 되었다. 또 그동안 강원도에 속해오던 것을 1963년부터 경상북도로 옮겨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그로 인해 경상북도에서 8번째로 넓은 영역을 가지게 되었으며, 대부분이 산악지대로 이루어져 군세(郡勢)는 그리 크지 않지만, 이곳에는 어느 지역보다도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동팔경 중 2곳이 바로 이 울진군에 속해있는데, ‘망양정(望洋亭)’과 ‘월송정(越松亭)’이 바로 그것이다.
[관동팔경이란]
관동팔경(關東八景)이란 관동 지방에서 가장 경치가 띄어난 8곳을 말한다. 여기서 ‘관동’이라는 명칭은 고려 성종 14년(995) 전국을 10개도로 편성할 무렵, 관내도(關內道)인 서울·경기 지역의 동쪽이라는 데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측되며, 대관령(大關嶺)의 동쪽인 영동지방만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팔경은 영동지방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8곳의 명승지를 말하기 때문에 관동팔경을 ‘영동팔경’이라고도 한다.
관동팔경은 언제, 누구에 의해 정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지금은 통천의 총석정·고성의 삼일포·간성의 청간정·양양의 낙산사·강릉의 경포대·삼척의 죽서루·울진의 망양정과 월송정을 말한다. 관동팔경은 시대에 따라 그 대상에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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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관동팔경 현황
강원도 존무사였던 안축이 관동의 경치감흥을 읊은 「관동별곡」[1330]에 관동팔경이란 말은 보이지 않으나, 총석정·삼일포[사선정]·영랑호·낙산사·경포대[한송정]·죽서루·망양정·월송정 등의 관동팔경에 속한 정자 이름들이 나온다. 이로보아 이 보다 훨씬 이전에 관동팔경이란 말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후 정철이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하여 금강산과 관동팔경 등의 명승을 두루 유람한 후 그 도정(道程)과 소감 등을 읊은 『관동별곡』[1580]에 총석정·삼일포[영랑호]·청간정·낙산사[의상대]·경포대·죽서루·망양정이 등장한다. 그는 관동지역의 해금강에서 평해의 망양정까지 둘러보았지만, 그 보다 남쪽에 있는 월송정에는 가지 않았다. 이는 월송정이 당시 8경에 포함되지 않았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자료라 하겠다.
한편, 관동팔경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은 미수 허목의 「죽서루기(竹西樓記)」[1662]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여기서는 동해의 절승지 8곳으로 통천의 총석정·고성의 삼일포와 해산정·변성[지금 속초]의 영랑호·양양의 낙산사·명주[지금 강릉]의 경포대·척주[지금 삼척]의 죽서루·평해의 월송포를 들고 있다.
그리고 정선이 그린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의 「관동팔경도(關東八景圖)」[1738]에는 시중대·총석정·청간정·낙산사·경포대·죽서루·망양정·월송정의 그림이 있으며, 박순우의 『금강별곡(金剛別曲)』[1739]에는 ‘구군팔경(九郡八景)’이라는 말도 보인다. 또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1751]에서 흡곡의 시중대·통천의 총석정·고성의 삼일포·간성의 청간정·양양의 청초호·강릉의 경포대·삼척의 죽서루·울진의 망양정을 관동팔경이라 하였다. 허필[1709~1768]의 「관동팔경도병」 그림에도 총석정·삼일포·청간정·낙산사·경포대·죽서루·망양정·월송정이 포함되어 있다.
또 노래로도 불려졌는데, 「금강산가(金剛山歌)」[1816, 작자미상]에 “관동팔경 구경가세” 하면서 시중대·총석정·해금강·낙산사·경포대·죽서루·망양정·월송정 등을, 「관동장유가(關東壯遊歌)」[1859, 작자미상]에서도 “관동팔경 벌어 있어 곳곳이 명승이요 구석구석 별계(別界)로다”로 시작하여 총석정·삼일포·청간정·낙산사 등을 노래하고 있다. 또 『강원도지(江原道誌)』[1941]에는 흡곡의 시중대·통천의 총석정·고성의 삼일포·간성의 청간정·양양의 청초호·강릉의 경포대·삼척의 죽서루·울진의 망양정을 관동팔경으로 꼽고 있다.
그러나 김상성의 「관동십경(關東十境)」[1746]에 시중대·총석정·삼일포·해산정·청간정·낙산사·경포대·죽서루·망양정·월송정이 실려 있어 ‘관동십경’이라는 말도 탄생하였다. 기존의 8경에 흡곡의 시중대와 고성의 해산정을 더한 것이다.
이렇게 관동팔경은 시대에 따라 그 대상이 들어갔다 빠졌다하는데, 대체로 흡곡의 시중대와 울진[평해]의 월송정이 그러하다. 그래서 『금강별곡』의 ‘구군팔경(九郡八景)’이라는 말에 근거하여 처음에 9군 9경이었던 것이 ‘팔(八)’이라는 숫자에 맞추다보니 관동팔경이 되었다고 추정하기도 하며, 조선 숙종[1674~1720]이 관동팔경을 시로 읊으면서 1군(郡) 1경(景)이라는 기준이 마련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관동의 9군에 1경씩 부여했을 경우 8경이 아니라 9경이 되고 당시 평해군에는 2경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견해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사실, 팔경(八景)이란 중국 송대(宋代)의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라는 그림에서부터 시작된다. 「소상팔경도」는 중국 후난성[湖南省] 둥팅호[洞庭湖]의 남쪽 링링[零陵] 부근, 샤오수이강(瀟水)과 샹장강[湘江]이 합류하는 곳의 뛰어난 경치를 8가지 소재로 하여 그린 것으로 이 그림의 제목[畵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북송(北宋)의 송적(宋迪)에 의해 처음 8폭의 그림으로 그려져 1078년에 그 형식이 확정되어 8경이란 아름다운 자연 경관의 대명사로 불리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고려 명종[1170~1197]의 어명으로 이광필이 「소상팔경도」를 그렸다는 『고려사(高麗史)』 권122 열전 제35 방기조의 기록으로 보아 늦어도 12세기 중엽에 그 양식이 도입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소상팔경의 우리나라 수용과 더불어 고려에서 중국의 팔경도(八景圖)를 받아들이고 그 다음 경관으로서의 팔경 선정으로 진전된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관동팔경’이라는 명칭의 시작은 늦어도 고려 전기 이후일 것으로 추정되며, 대부분의 사료가 8경을 말하고 있으므로 처음부터 9경이 아니라 8경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망양정과 월송정]
망양정은 울진군의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왕피천 하구에 위치한다.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넓은 동해를 바라보며 산 정상에 날을 듯 앉아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이 정자는 정면 3칸 ×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기와집이다. 망양정은 고려시대에 기성면 망양리 해안가에 처음 세워졌다고 전하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세월이 오래되어 허물어진 것을 조선 1471년(성종 2) 평해군수 채신보(蔡申保)가 현종산(縣鍾山) 남쪽기슭으로 옮겨 놓은 후부터의 흔적은 찾을 수 있다. 1517년(중종 12) 비바람으로 정자가 파손되어 다음 해에 안렴사 윤희인(尹希人)이 평해군수 김세우(金世瑀)와 협의하여 중수하였고 1590년(선조 23) 평해군수 고경조(高敬祖)가 다시 중수하였으나 또 허물어졌다. 세월이 오래되어 방치될 때 1854년(철종 5)에 울진현령 신재원(申在元)이 망양정을 이축할 것을 향회(鄕會)에 발문해 지금의 위치인 둔산 해안봉에 장소를 정하였으나, 재정이 부족하여 추진하지 못하다가 1860년(철종 11) 윤 3월 6일에 울진현령 이희호(李熙虎)가 옮기고 그 이름은 그대로 하였다.
그리고 월송정은 울진군에서도 남쪽 평해에 위치한다. 월송정(越松亭, 月松亭)은 그 유래에서도 2가지 설이 존재한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가 지은 다음의 ‘월송정기’에 잘 나와 있다.
"월송정은 군청 소재지의 동쪽 6·7리 거리에 있다. 그 이름은, 어떤 이는 ‘신선이 솔숲을 날아서 넘는다(越松)’는 뜻을 취한 것이라 하고, 어떤 이는 월(月)자를 월(越)자로 쓴 것으로 소리[聲音]가 같은 데서 생긴 착오라고 하니, 두 설 중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내가 달월(月)자를 버리고 월나라월(越)자를 취한 것은 이 정자의 편액을 따른 것이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평해군편에는 신라시대 술랑 등이 여기서 놀고 쉬었다고 하였다. 「관동지」·「관동읍지」등 에는 신라때 화랑들이 달밤에 솔밭에서 달[月]을 구경하며 놀았기 때문에 달월(月)자를 쓰기도 하고, 중국 월(越)나라의 소나무를 옮겨와 이곳에 심었다 하여 월나라월(越)자를 써서 월송정이라고 하기도 한다는 기록들이 간략히 보이고 있지만, 사실 어느 하나라도 쉽게 믿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18세기 전반~20세기 전반까지 간행된 조선시대 「여도」·「팔도지도」·「여지도서」·「해동지도」등 20개의 고지도(古地圖)에서 ‘월송(정)’ 명칭에 대해 살펴보면, 월나라월(越)자를 표시한 것이 17개이며, 달월(月)자를 사용한 것은 3개뿐이다. 또 일본에서 1873~1882년에 간행된 「조선국세견전도」·「오기팔도 조선국세견전도」·「동각 조선여지전도」·「원 조선팔도지도」·「조선전도」를 살펴보아도 모두 월나라월(越)자를 사용하여 월송정을 표기하고 있다. 시기적으로도 18세기 전반에는 ‘월(越)송정’ 이었으나, 19세기 전반부터 ‘월(月)송정’을 혼용하다가 오래 사용하지 못하고 곧 바로 사라진 것 같다. 이렇게 당시 고지도들을 통해서도 월송정의 명칭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월송정의 창건 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고려 충숙왕 13년(1326)에 존무사 박숙(朴淑)이 창건하였다거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관찰사 박원종(朴元宗)[1467~1510]이 처음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축(安軸)[1287~1348]의 취운루 기문에 의하면, 고려 충성왕 4년(1312)에 벌써 월송정(越松亭)이 있었으며, 또 안축이 강릉도존무사로 1330년에 임명되어 해당 지역을 둘러보고 남긴 「관동와주(關東瓦注)」와 「관동별곡(關東別曲)」에 월송정이 이미 나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곡(李穀)[1298~1351]의 시에 정자가 기록되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 즉 늦어도 14세기 초에는 이미 월송정이 창건되어 있었던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선조들의 망양정과 월송정 유람]
관동팔경은 어느 한 곳이 아닌 다양한 위치에 입지해있는 누정(樓亭)을 중심으로 형성된 경(景)으로 바다·호수·강의 경관을 모두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를 입지별로 구분해 보면, 바다에 위치한 정자[海亭]는 총석정·낙산사·청간정·망양정·월송정이며, 호수에 위치한 정자[湖亭]는 삼일포의 사선정, 경포호의 경포대, 시중호의 시중대이며, 강에 위치한 정자[江亭]는 오십천에 입지한 죽서루이다.
이렇게 관동팔경은 특출한 경관을 택하여 설정된 것으로 경의 대상이 대부분 인공경관인 누정이라는 면과 주 경치가 바다와 호수·강이라는 경관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주변 자연의 지형적인 특이함이나 기묘함과 시간, 계절, 공간에 따라 변하는 모든 자연현상과 일상생활이나 인간의 삶 등 인간사와 관련된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시청각적으로도 감지되는 모든 것 뿐만 아니라 가상적인 이상향과 같은 시각적으로 감지할 수 없는 것까지도 경으로 표현하였다. 즉 풍류를 즐기며, 이곳에 왔다가 간 사람들은 시문(詩文)과 그림 등으로 그것을 남겼던 것이다.
특히, 조선 숙종 임금은 관동팔경 중 망양정 경치가 최고라 하여 ‘關東第一樓(관동제일루)’란 현판을 하사하였으며, 망양정의 절경을 읊은 유명한 시와 글로는 숙종(肅宗)과 정조(正祖)의 어제시(御製詩), 정추·김시습의 시 등 다수가 전해 온다.
뭇 멧부리들이 첩첩이 둘러 있고/ 놀란 파도 큰 물결 하늘에 닿아 있네/ 만약 이 바다를 술로 만들 수 있다면/ 어찌 한갓 삼백 잔만 마시리 [숙종]
태초의 기운 아득히 바다에 풀어지니/ 뉘라서 이곳에 망양정을 알 수 있으리/ 흡사 문선왕 공자의 집을 훑어보듯/ 종묘며 담장 하나하나 훑어본다 [정조]
십리에 모래 펀펀한데 큰 바다를 바라보니/ 해천(海川)은 멀고 넓은데 달빛이 창창하네/ 봉래산이 그야말로 속세와 떨어졌으니/ 사람은 명아주 한 잎 가에 떠 있구나 [김시습]
그리고 월송정의 절경을 읊은 유명한 글로는 숙종과 정조의 어제시, 안축·이곡·김시습·이산해의 시 등 다수가 전해온다. 특히 임금으로서는 조선시대 숙종과 정조의 시가 전해오는데, 임금이 직접 관동팔경을 방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궁중화가들로 하여금 그림을 그려오게 하여 감상하였는데, 이 그림을 보고 숙종과 정조는 월송정에 대한 감흥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선랑의 옛 자취 어디에서 찾을까/ 만 그루 장송(長松)들 빽빽이 들어섰네/ 백설같은 모래 바람 눈 안에 가득/ 올라가 한번 바라보니 흥 못 참겠다 [숙종]
정자를 둘러싼 송백은 울울창창한데/ 갈라진 나무껍질 세월이 오래로다/ 넓고 넓은 푸른 바다는 쉼 없이 출렁이는데/ 돛단배는 석양에 무수하게 떠 있구나 [정조]
또 조선 초기의 학자인 김시습(金時習)도 이곳에 와서 풍류를 즐겼으며, 한말의 의병장인 신돌석(申乭石)도 이곳 월송정에 올라 당시의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걱정하며, ‘우국(憂國)’이라는 시를 남겼다.
춘풍이라 따스한 봄날의 월송정이여/ 푸른 강 맑은 모래 십리나 이어졌네/ 끝없는 평원에 무한한 생각 일어나는데/ 불 탄 흔적에 풀색이 그 더욱 푸른 것을 [김시습]
누(樓)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고/ 낙목에 가로 놓인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남아 27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 문득 가을바람이 부니 감개만 이는구나 [신돌석]
한편, 우리 선조들은 글뿐만 아니라 그림으로도 망양정과 월송정을 읊기도 하였다. 망양정과 월송정을 그린 산수화가 몇 점 전해져 오고 있는데, 대부분 조선 후기의 작품이다. 대표적인 것이 정선의 그림이며, 월송정은 이정, 정충엽, 강세황, 김홍도도 그렸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팔경도의 효시인 「소상팔경도」는 『고려사』의 기록으로 보아 고려 명종조에 이광필에 의해 처음으로 그려졌다. 이렇게 시작된 「소상팔경도」는 우리나라에서는 모사(模寫)라는 인습적인 수용으로 내려오다가 겸재 정선[1676~1759]에 이르러 비로소 한국적인 산수도(山水圖)와 팔경도(八景圖)가 시작된다. 정선은 중국식의 관념산수인 남종화(南宗畵)에서 과감히 탈출하여 한국적인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새로운 회화, 즉 실경산수화를 수립하게 된다. 정선은 63세(1738) 때, 8촌 친척아우인 우암(寓庵) 최창억(崔昌億)을 위해 11폭의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을 제작하였는데, 그 가운데 「망양정도」와 「월송정도」가 있다.
「망양정도」는 원 위치인 기성면 망양리에 있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비만 오려면 큰 종이 울리듯이 소리가 난다는 현종산(懸鐘山) 산자락이 동해와 맞물리는 천길 절벽위에 높이 지어졌다던 망양정의 모습이 이 그림에서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현종산 산자락이 급하게 내려오다 동해의 격랑에 부딪쳐 주춤 물러서며 불끈 솟구쳐 낸 수직 절벽이 까마득한데 그 끝에 제비집처럼 위태롭게 정자를 세웠다. 규모도 웅장하여 정면 3칸 측면 2칸의 날아 갈 듯한 팔작기와집으로 석축을 높이 쌓아 든든한 느낌이다. 그 뒤로는 정자의 부속건물이 산자락에 기대어 지어졌는데 솟을대문에 담장이 이어져 있어 마치 대가집 사랑채나 행랑채처럼 보인다. 산자락을 아래위에서 뒤덮은 소나무 숲의 짙은 먹빛과 끝없이 넘실대는 동해바다의 푸른 물결이 신묘한 대조를 보이는 가운데 절벽의 웅장한 기세는 망양정의 고절한 위치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건너편 백사장 위로 서릿발처럼 돌기한 백색 화강암기둥들은 여기에 기이한 느낌을 더 보태어 준다. 숙종이 겸재 정선이 그린 관동팔경 화첩 중 망양정 그림를 보고 감탄하여 ‘관동제일루’라는 현판을 내린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의 경치를 생동감 넘치면서도 고요한 운치를 느낄 수 있는 「월송정도」는 빽빽이 들어찬 긴 소나무 숲을 화면 중앙에 대담하게 포치하고 울창한 수림(樹林)의 가지와 잎새를 먹구름처럼 칠해놓은 겸재 특유의 묵송법(墨松法)으로 분방하게 묘사하여 송림의 정취를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월송정 주변에는 소나무 숲과 모래해변이 펼쳐지며, 화면의 왼쪽에는 굴미봉이라는 바위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고, 오른쪽으로는 석축으로 쌓은 돈대(墩臺) 위에 누각이 크게 서 있다. 이 누각이 바로 월송정으로 정면 3칸 ×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이며, 그 아래에는 성문이 있고 양옆으로 성벽이 이어져 한 눈에 문루(門樓)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월송정은 이 지역 해안경비를 관장하던 월송포진성(越松浦鎭城)의 성문구실을 함께 겸한 것이었다. 또 정자 주변에는 월송진성의 장인 만호(萬戶)가 살던 관청과 관사인 듯한 기와집들이 들어서 있으며, 그 앞에는 하천이 돌아 동해로 유유히 흐르고 그 옆에는 말탄 나그네가 길을 가고 있다.
[관동팔경 속의 망양정, 그리고 월송정의 문화사적 의미]
이렇게 관동팔경은 이름 그 자체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아름다운 경관을 대표하는 단어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이곳의 빼어난 경치를 시나 가사 등과 같은 문학으로 표현하였고, 그림으로도 묘사하였으며, 노래로도 표현하면서 풍류를 즐겼다. 이러한 것들은 역사적 자료를 많이 갖고 있지 못한 관동팔경에 대해, 좁게는 울진, 더 좁게는 망양정과 월송정에 관해 많은 내용들을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정자(亭子)의 ‘정(亭)’자는 경치 좋은 곳에 놀기 위해 지은 집이라는 뜻으로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는 ‘정자는 사방이 툭 트이고 텅 비고 높다랗게 만든 것’이라고 하면서, ‘여름에 손님과 함께 동산에다 자리를 깔고 누워 자기도 하고 혹은 앉아서 술잔을 돌리기도 하고 바둑도 두고 거문고도 타며 뜻에 맞는 대로하다가 날이 저물면 파하니, 이것이 한가한 자의 즐거움이다.’ 라고 「사륜정기」를 통해 정자에서의 즐거움을 말하기도 하였다. 정자 중에서 특히 관동팔경에 있는 정자가 가장 유명하다. 이중에서도 월송정이 가장 유명하다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조선 성종[1469~1494]이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조선팔도의 정자 중에서 가장 풍경이 뛰어난 곳을 그리도록 했는데, 영흥의 용흥각과 평해의 월송정만이 뽑혔다. 사람들이 1·2등을 쉽게 정하지 못하자 임금이 “용흥의 연꽃과 버드나무가 아름답기는 하나 월송정에 비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극찬하였다는 것이다. 이로서 수많은 시인묵객, 선비, 화랑들이 울진[평해]을 유람하였으며, 또 월송정에서 풍류를 즐겼음은 쉽게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 속에 세상은 이를 가만두지 않았으며, 풍류문화도 차츰차츰 사라져가자 우리의 정자도 서서히 퇴락되어 갔다. 어느 시기 월송정이 퇴락되자 옛 평해군 관사 재목(材木)으로 1933년 이축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말기 월송에 주둔한 해군이 적기내습의 목표가 된다하여 철거하였다. 이렇게 폐허가 된 것을 재일교포로 구성된 금강회(金剛會)에서 콘크리트로 2층 정자를 1969년에 신축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정자의 옛 모습 살필 길 없어 1979년 울진군청에서 해체하고 1980년에 지금의 위치에 정자를 다시 지었다. 그런데, 지금의 월송정 현판을 당시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이 쓰게 되니 여기서 우리는 역사의 흐름을 다시 느끼게 된다.
또한 망양정도 지금까지 세 번을 옮기는 역사적 과정을 겪게 되는데, 여러 차례 보수가 이루어지다가 결국 2005년에 철거하고 새로 짓게 된다.
조선 선조 13년(1580)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이 관동지방을 여행하고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에 현종산의 망양정에서 바라본 경치가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 … 東天의 밑바닥까지라도 흠뻑 보고져하여 望洋亭 오른 말이,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고. 가뜩 노한 고래 뉘라서 놀래관대, 불거니 뿜거니 어지러이 구는지고 銀山을 꺾어내어 六合에 나리는 듯, 五月長天에 白雪은 무삼일고, 져근덧 밤이 들어 風浪이 정하거늘, 扶桑咫尺에 明月을 기다리니, 瑞光千丈이 뵈는 듯 숨는고야. 珠簾을 고쳐 걸고, 玉階를 다시 쓸며, 啓明星 돗도록 고초 앉아 바라보니, 白蓮花 한가지를 뉘라서 보내신고, 이리 좋은 世界 남대되 다 뵈고져 … ”
이는 정철이 파도치는 바다의 풍경을 경(景)의 대상으로 삼았음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하늘 끝을 다 보지 못한 서운한 마음으로 망양정에 올라 천지의 광활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곳, 수평선 너머는 신비의 세계요, 질시를 모르는 이상향, 구원(久遠)의 뿌리박은 낙원으로 알았다. 즉 송강의 자연은 하나는 현실적인 자연이요, 다른 하나는 가상적인 자연으로 구분된다. 망양정에서 조망되는 하늘은 현실적인 자연이지만, 하늘 밖의 세계는 가상적인 자연으로 보았다는 것을 볼 때 송강은 미지의 세계까지도 경관구성요소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옛날 관동팔경의 망양정과 월송정을 소재로 한 시에서 당시의 생각을 읽을 수 있으며, 망양정과 월송정이 그려진 한 폭의 작은 옛 그림과 옛 지도 속에서도 정자의 모습 등을 유추할 수가 있고, 이로 인해 지역문화와 그 지역 삶의 현장에 있는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살필 수가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선조들은 관동팔경의 감흥을 시인은 시로써, 화가는 그림으로써 표현하였는데, 우리는 이를 감상함으로써 당시의 뛰어난 자연환경과 누각 건축의 아름다움을 상상할 수 있으며, 더 크게는 누각에 왔던 당시 사람들의 사상(思想)까지도 읽을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