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3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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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完州郡-農民會 |
영어공식명칭 | Catholicism Peasants' in Wanju-gun |
이칭/별칭 | 천주교 전주교구,가톨릭농민회 완주군 협의회,전주교구 가톨릭농민회 완주군협의회,천주교 전주교구 가톨릭농민회 완주군협의회,한국가톨릭농민회 전주교구연합회,완주협의회완주가톨릭농민회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대길 |
설립 시기/일시 | 1980년 12월 - 한국가톨릭농민회 전주교구연합회 완주협의회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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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83년 - 한국가톨릭농민회 전주교구연합회 완주협의회 KBS시청료거부투쟁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85년 - 한국가톨릭농민회 전주교구연합회 완주협의회 소몰이 투쟁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0년 - 완주군 가톨릭 농민회 농민운동에서 환경과 생명운동으로 운동 방향 전환 |
최초 설립지 | 한국가톨릭농민회 전주교구연합회 완주협의회 -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읍내7길 20[읍내리 99] |
현 소재지 | 용진봉동분회 -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 신지송광로 399[간중리260-1] |
성격 | 사회운동단체|농민운동단체 |
[정의]
1980년 12월 전라북도 완주군에서 천주교 농민을 중심으로 설립한 농민운동단체.
[개설]
1960년대 이후 농민과 농촌문제를 인권의 문제로 접근하면서 한국 천주교회가 농민운동을 주도했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진원지가 되면서 이후 민주화운동은 상징적인 보루가 되었다. 특히 천주교 전주교구 가톨릭농민회 완주군협의회는 고산성당의 박병준 신부와 문규현 신부 등을 중심으로 1980년대 초반 노퐁피해보상운동, KBS-TV 시청료 납부 거부운동, 외국농축산물 개방 반대[소몰이 시위] 시위 등을 주도하면서 강력한 민주화운동 단체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90년대 전국농민회 총연맹을 결성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후 교회 본연의 역할에 매진하고자 우리농촌살리기운동과 환경 및 생명운동으로 전환하여 활동하고 있다.
[설립 목적]
한국가톨릭농민회는 농민 스스로의 단결과 협력으로, 농민의 권익을 옹호하고, 인간적 발전을 도모하며, 사회정의 실현을 통한 농촌사회의 복음화와 인류공동체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설립했다. 완주군 가톨릭 농민회[공식 명칭 한국가톨릭농민회 전주교구연합회 완주협의회]의 설립 목적도 이와 같다.
[변천]
1960년 2월, 김제성당[현 요촌성당]에서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이 시작되었고, 1964년 10월에는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 안에 ‘농촌청년부’가 설치되어 낙후된 농촌의 근본 문제와 해결책을 모색했다. 1968년 8월 가톨릭노동청년회 산하 ‘농촌청년부전북교구연합회’가 지방조직으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1972년 4월에는 ‘가톨릭농촌청년회’가 ‘한국가톨릭농민회’로 탄생했고, 1976년 1월 9일 한국가톨릭농민회 전북연합회가 창립되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천주교 전주교구 농민회가 본격적으로 농민의 권익을 위해 나서기 시작한 시기는 1979년이었다. 1978년에 박정희 정권은 수확량을 내세워 신품종 벼 종자 ‘노풍’에 대한 권장을 넘어 강제하고 강요했다. 그런데 ‘노풍’이 냉해를 입어 오히려 수확량이 격감해버렸다. 이에 고산천주교회[담임 문규현 신부]도 1979년 3월 17일~26일 비봉·고산·운주 등 3개 면 11개 리 164 농가의 피해조사를 한 다음 1970년 4월 9일 고산성당에서 ‘노풍피해보상 촉구 기도회’를 개최하면서 체계적으로 당국에 보상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결과적으로 피해 농가는 전액은 아니지만, 일정 부분 피해 보상을 받았다.
1980년 5월, 고산성당 내에 농민상담소가 개설되어 농민의 권익 옹호를 위해 노력했고, 민주농협 실현을 위한 기도를 가지면서 1980년 12월에 완주군협의회[공식 명칭 한국가톨릭농민회 전주교구연합회 완주협의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는 전국 단위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완주군 가톨릭 농민회는 이후 각종 교육을 통해 농민의 의식을 고양했다. 한편 1983년에는 고산 지역을 중심으로 ‘KBS-TV 시청료 납부 거부 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농협 조합장 직선제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고, 잡부금 실태도 조사했다. 1980년대 초, ‘개방농정’으로 인해 국내에 400여 종의 외국 농축산물이 유입되었고, 1985년에 들어 외국 농축산물의 무분별한 수입이 가속화되었다. 이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농민은 소 사육 농가였다. 이에 외국 농축산물 수입 반대와 소값 피해 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를 소몰이 시위라 부른다. 1985년 4월부터는 완주군 가톨릭 농민회와 고산성당이 주축이 되어 외국 농축산물 개방반대와 소값 피해 보상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후 농가 부채 탕감 투쟁, 미국 농축산물 수입저지 운동, 농협 민주화 투쟁, 농촌의료보험 투쟁, 고추 전량수매 투쟁 등을 통해 농민의 생존권 확보와 이 땅의 민족·민주화 운동 및 통일운동으로 이어졌다. 1990년 이후는 생명운동 차원에서 농촌살리기 운동과 우리 밀 살리기 운동 등으로 전환되었다. 이것은 그간 생존권 차원의 투쟁에서 한발 더 나아가 우리 민족 전체가 함께하는 생명공동체를 건설하는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성숙된 것이다. 그리고 1990년 1월 18일 완주군농민회가 설립되고, 1990년 4월 4일 전국농민회 전북도연맹이 창립되면서 그간 활동 폭을 정리하면서 사안에 따라 연대하거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게 된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완주군 가톨릭 농민회는 친환경농업농법의 공유를 통한 생명농업 확대와 도시생활공동체를 연계한 우리농촌살리기운동, 자주적 평화통일, 민주화, 자립경제 등 활동을 벌이고 있다.
[현황]
완주군 가톨릭 농민회는 2000년대 들어 협의회 구성이 여의치 않아 분회 활동으로 전환되었다. 현재는 용진봉동분회[공식 명칭 가톨릭농민회 전주교구연합회 용진봉동분회]가 활동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완주군 가톨릭 농민회는 1960년대 생존권 차원의 농촌문제 해결과 인권의 신장을 위한 초보적인 운동에서 1970년대 유신독재와 1980년대 군사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화운동의 최선봉이자 보루의 역할을 수행했다. 1990년대 전국적인 농민조직이 결성되면서 친환경농법, 생명공동체운동, 통일운동, 도시생활동공체와 함께 하는 우리농촌살리기운동으로 전환되었다.